벽에 머리 찧으며… 연극과 전쟁 치르는 남자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6.04.07 03:00 | 수정 : 2016.04.07 04:47

[제26회 이해랑연극상]

- 이해랑연극상에 김광보 연출가
94년 데뷔… 극단 청우 창단
'종로 고양이' '발자국 안에서'등 20여년간 90편 넘는 연출작
"지나친 욕망이 파멸 부르는 인간 본연의 모습 파헤칠 것"

제26회 이해랑연극상
"저… 정말입니까?"

제26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수화기 저편의 연출가 김광보(52) 서울시극단장은 5초 동안의 침묵 끝에 소년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한국 연극계의 대표적인 중견 연출가 중 한 사람이자 '이름 자체가 브랜드'로 통하는 그에게도 이해랑연극상은 범접할 수 없는 고지(高地)와도 같았던 것이다.

"온갖 생각이 다 머리를 스치더군요. 저 자신의 연극 인생을 성찰하도록 해 주시는 상인 것 같습니다." 연출작 '헨리 4세―왕자와 폴스타프' 공연이 열리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을 때 그가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는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성공한 흙수저'다. 나이 들어 학사학위를 받긴 했지만, 오래도록 그는 '지방 출신의 고졸 연출가'였다. 유복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던 부산 금성고 재학 시절, 극적으로 눈앞에 '탈출구'가 나타난 것이 고교 졸업 직전인 1983년이었다. "중앙동 한 건물에 '워크숍 단원 구함' 벽보가 붙어 있더라고요." 삐걱거리는 일본식 목조건물 문을 운명처럼 열었을 때, 연극 인생의 문도 함께 열렸다.

그때부터 10년 동안 김광보는 무대 뒤편의 조명기사로서 이력을 쌓았다. 기술적이고 세밀한 곳에서부터 연극을 배워 나갔던 것이다. 1986년에는 부산에서 활동하던 연출가 이윤택과 한솥밥을 먹었고, 1989년에는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다.

1994년, 극단 종각에서 첫 연출작 '지상으로부터 20미터'를 올렸다. 이후 극단 청우를 창단해 '종로 고양이' '뙤약볕' '발자국 안에서' 같은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성열·박근형·최용훈 등과 함께 혜화동1번지 2기 동인으로 활동하며 성장했다. 20여년 동안 그의 연출작은 90편이 넘었다.

‘헨리 4세’를 공연 중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객석에 앉은 연출가 김광보는“앞으로 누구나 쉽게 보고 공감할 수 있는 연극을 만들겠다”고 했다.
‘헨리 4세’를 공연 중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객석에 앉은 연출가 김광보는“앞으로 누구나 쉽게 보고 공감할 수 있는 연극을 만들겠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2014년 한 해에 극 중 배경의 국적(國籍)이 모두 다른 일곱 편의 연극을 올렸을 때 '세계 일주 연출 아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느 시대 어느 공간이라도,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 파멸을 가져온다는 본연의 모습은 같았다. 내 연극은 그것을 파헤친다."

결국 모든 김광보 연출작이 그 '본연의 모습'의 변주인 셈이었다. 그가 대표작으로 꼽는 4편 중 '인류 최초의 키스'는 청송 보호감호소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고, '그게 아닌데'는 욕망이 낳은 소통의 부재를 짚었다. '줄리어스 시저'는 빼앗음과 뺏김의 이야기였으며, '사회의 기둥들'은 그 욕망이 비뚤게 발현된 모습을 담았다. 지난해 메르스 파동 한가운데서 전회 만석을 기록한 '프로즌'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그는 희곡 텍스트를 철저히 분석하는 연출자로 유명하다. 창작극이든 셰익스피어 극이든 대본과 전쟁 치르듯 꼼꼼히 읽은 뒤, 치밀한 연습을 통해 대사 하나, 작은 행동 하나까지 느슨해지지 않도록 다져 작품의 밀도를 팽팽하게 높인다. 그러기 위해 "잇몸이 곪고 뒷목이 굳어 고개 돌리기도 힘든 상태가 될 때까지 손톱을 물어뜯고 벽에다 머리를 짓찧는다"(배우 길해연의 표현)는 것이다.

지난해 서울시극단장이 된 이후 그는 연극의 공공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나는 형제다'의 지방 공연에서 중간에 나가는 관객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좀 더 보편적이고 쉬운 연극,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연극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게 된 연극이 현재 공연 중인 '헨리 4세'다. "셰익스피어 극이 이렇게 재미있고 역동적인 줄 몰랐다는 말이 나오도록 만들었습니다." 9월엔 '햄릿'을 강남 재벌 이야기로 바꾼 '함익'을 올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