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둔 惡人, 잃어버린 순수함 회복한 거죠"

  • 양지호 기자

입력 : 2016.03.22 03:00

드라마 '화려한 유혹'의 정진영… '할배파탈' 악역으로 인기몰이"
강석현, 善惡 섞인 입체적 인물… 구한말 지식인役 맡아보고 싶어"

정진영은“‘할배파탈’이라는 별명까지 붙으면서 사랑받았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또 다른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정진영은“‘할배파탈’이라는 별명까지 붙으면서 사랑받았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또 다른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우리는 '내 상처가 더 크다'며 싸우죠. 누구의 상처가 더 큰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려 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22일 종영하는 MBC 드라마 '화려한 유혹' 주역 정진영(52)을 서울 팔판동 카페에서 만났다. 이 드라마는 경쟁작에 밀려 초반 화제성은 부족했지만 '할배파탈'(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할아버지)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그의 호연에 힘입어 월화 드라마 시청자를 양분했다. 그가 연기한 강석현은 수천억대 비자금을 끌어모은 부패한 정치인이자 친딸에게도 무심한 비정한 남자다. 그런 그가 젊었을 때 사랑했던 여인과 꼭 닮은 35세 연하 신은수(최강희)를 만나고, 복수를 위해서 자신에게 접근한 그녀와 결혼하고 서서히 인간미를 되찾는다. 강석현은 치매로 기억을 잃어도 비자금을 포기하게 되더라도 그녀만은 지키려 한다. 시청자는 그의 순애보와 강단에 반했다. 할배파탈 열풍으로 40회쯤 퇴장할 예정이었던 그의 분량도 늘어났다.

영화 '국제시장' '왕의 남자' '7번방의 선물'로 1000만 관객 영화에 3번이나 출연한 그에게도 인기는 새삼스러웠다. 심지어 강석현 역은 한 번 고사했던 배역이었다. "연출을 맡은 김상협 PD와는 드라마 '동이' 때부터 알던 사이라 술을 마시기로 했는데 작가분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거예요. 틀에 박힌 뻔한 악역은 싫어해요. 잘해봐야 '로맨틱한 춘향전 변사또'라고 생각해 안 하려고 했는데 술자리에서 작가들이 '선과 악으로 나누기 어려운 입체적 인물'이라며 저를 설득했죠."

그가 분석하는 강석현의 매력은 조금 달랐다. "죽음을 앞둔 노인이 자신의 삶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여성을 만나 반성하는 겁니다. 은수에 대한 사랑보다는 잃어버린 순수함의 회복이라고 봐야죠." 그는 극을 통해 반성과 이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고 한다. "극중에서 강석현이 '인간은 모두 선하지만 조금씩은 악한 존재'라고 해요.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상처 입은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내 상처가 더 크다'며 계속 싸우는 내용이죠. 강석현은 악인이지만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반성합니다."

그는 '할배파탈'이란 별명을 잊겠다고 했다. 정진영은 "인기를 얻게 해준 배역만 하려고 들면 배우 인생이 망가진다"며 "한때의 환호가 지속되리라 믿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했다.

대신 1920~1930년대를 살았던 한반도의 지식인 역할이 탐난다고 했다. "드라마가 끝나고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를 4권까지 한달음에 읽어 내려갔어요. 20세기 초반 중국 격변의 시기를 살아낸 장제스와 마오쩌둥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좋은 질료가 많더라고요. 우리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지식인들에 얽힌 소재가 많을 겁니다. 좋은 질료는 불안과 희망이 공존했던 위기의 시기에 있는 법이죠. 고뇌하는 당시의 인물을 맡아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