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3.17 03:00 | 수정 : 2016.03.17 13:15
한국인의 초상
정규직이 될 때까지 혼인신고도 미루고 악착같이 살던 남자는 아내가 아이를 남기고 떠난 뒤 헐레벌떡 땀에 젖어 회사로 달려가 사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르지만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돌연 그의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뜬다. "사용자는 자신의 감정 기복에 따라 비정규직 근로자를 아무 때나 함부로 해고할 권리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연극 '한국인의 초상'(사진·고선웅 연출)은 속사포 같고 폭포수 같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등장한 정재진·김정은·백석광 등 각 세대를 대표하는 배우 12명은 85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격렬하게 떠들고 질주한다. 연출가 고선웅이 배우들과 함께 쓴 극본은 출근길 지옥철, 훈계불가, 섹스리스, 구시렁거리는 청춘, 성형 권하는 사회, 인력시장, 온라인 게임 등 27개 에피소드를 무대 위에 쏟아붓는다.
얼핏 맥락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은 의도적으로 과장된 연출과 은근한 유머를 통해 맵고 황당하며 분기탱천하고 부아가 치미는 이 사회의 촘촘한 점묘화를 만든다. 무당 옷 같은 가운을 입은 의사는 칼을 쌍절곤처럼 돌리고, 중년 사내의 확대된 '자신감'을 상징하는 커다란 바게트 빵은 기관총으로 변한다.
요란한 형식 자체가 압축성장을 이루며 덜컹거려 온 한국 사회를 상징한다. 무대 한쪽에 쓰인 '무소불위(無所不爲·못하는 일이 없음)' '마부작침(磨斧作針·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듦)' '불유여력(不遺餘力·있는 힘을 남기지 않고 다 씀)' 같은 무시무시한 글자들은 그 과정에서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피폐했는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연극은 '헬조선' 식의 한탄에 머무르지 않고, 마지막 장면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여준다. 동틀 무렵 지칠 대로 지친 대리기사들이 탄 셔틀버스에서 한 사람이 창 밖을 보며 외친다. "해 봐, 해 보는 거야." 이 중의적인 대사와 함께 한대수의 '물 좀 주소'가 흐르고, 배우들의 표정이 반가사유상처럼 변하면 극장 창문이 열리며 바깥에서 들어오는 조명이 장엄하게 극장을 물들인다. 소극장에서 기립박수를 쳐서 안 된다는 법은 없다.
▷28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소극장 판, 1644-2003
얼핏 맥락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은 의도적으로 과장된 연출과 은근한 유머를 통해 맵고 황당하며 분기탱천하고 부아가 치미는 이 사회의 촘촘한 점묘화를 만든다. 무당 옷 같은 가운을 입은 의사는 칼을 쌍절곤처럼 돌리고, 중년 사내의 확대된 '자신감'을 상징하는 커다란 바게트 빵은 기관총으로 변한다.
요란한 형식 자체가 압축성장을 이루며 덜컹거려 온 한국 사회를 상징한다. 무대 한쪽에 쓰인 '무소불위(無所不爲·못하는 일이 없음)' '마부작침(磨斧作針·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듦)' '불유여력(不遺餘力·있는 힘을 남기지 않고 다 씀)' 같은 무시무시한 글자들은 그 과정에서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피폐했는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연극은 '헬조선' 식의 한탄에 머무르지 않고, 마지막 장면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여준다. 동틀 무렵 지칠 대로 지친 대리기사들이 탄 셔틀버스에서 한 사람이 창 밖을 보며 외친다. "해 봐, 해 보는 거야." 이 중의적인 대사와 함께 한대수의 '물 좀 주소'가 흐르고, 배우들의 표정이 반가사유상처럼 변하면 극장 창문이 열리며 바깥에서 들어오는 조명이 장엄하게 극장을 물들인다. 소극장에서 기립박수를 쳐서 안 된다는 법은 없다.
▷28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소극장 판,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