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 女神도, 남자 때문에 속상해하는 女子였죠"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6.03.11 00:43

그리스 신화 소재로 한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주연 한송희·이주희·김희연 "여신을 현대 여성으로 재해석"

분명 그리스 신화 여신(女神)들이 나오는 연극인 줄 알고 극장에 들어왔는데, 무대에 등장한 것은 현대 여성들이다. "아 깜짝이야. 헤라, 언제 왔어?" "아프로디테, 오늘 너도 오는 거였어?" 12신전(神殿)에 모인 여신들의 말투가 홍대 앞 커피숍에서 만난 친구들 같다.

창작집단 라스(LAS)의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한송희 작, 이기쁨 연출)는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현대극처럼 각색한 참신한 작품이다. 여러 여자를 건드리는 제우스가 헤라의 타박을 받자 정색하며 "넌 그럼 오빠 싫어?"라고 말하는 장면 등이 처음엔 막장 드라마처럼 펼쳐져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든다. 하지만 점차 배우자의 외도, 남성 혐오증, 데이트 폭력 같은 문제들이 세 가지 유형의 여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진지한 토론극으로 변한다.

여신 역을 맡은 배우들. 왼쪽부터 김희연(아르테미스), 이주희(아프로디테), 한송희(헤라).
여신 역을 맡은 배우들. 왼쪽부터 김희연(아르테미스), 이주희(아프로디테), 한송희(헤라). /박상훈 기자

고전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세 여신을 연기한 배우는 헤라 역 한송희(30), 아프로디테 역 이주희(32), 아르테미스 역 김희연(30)이다. 연기 경력 10년 내외인 이들은 "옛 신화 속에서 지금 우리와 가까운 요소를 끄집어내 재해석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역을 맡은 김희연은 야전점퍼와 청바지 차림에 워커를 신고 나온다. "자립심이 강하지만 남자 관계에 서투른 여성을 상징해요. 사실 대단히 많은 현대 여성이 이런 기질을 가지고 있죠." 아르테미스는 완전무결한 성과를 추구하지만 사회적 소통에는 장애가 있다. "고집 세고 독단적인 면이 저하고 닮은 점도 있었는데요, 나중엔 사냥꾼 오리온에게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는 장면이 나와요."

레이스 달린 흰 블라우스와 꽃무늬 벌룬 스커트를 입고 나온 이주희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역이다. 연극 내내 '너 또 쟤랑 잤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여러 남자와 복잡한 관계를 가지는 인물이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선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성으로 볼 수 있어요. 자신감과 자존감이 크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작품의 극작을 맡기도 한 한송희는 커리어 우먼 스타일의 블라우스와 헐렁한 통바지를 입고 무대에 선다. 그가 맡은 역할은 질투의 여신 헤라, "남편 때문에 평생 속상해하고, 참다 참다 마지막에 복수에 나서는 캐릭터"다. "헤라가 중요하게 여긴 건 많은 현대 여성처럼 '관계를 유지하는 약속'이었어요. 그게 깨졌을 때 상처를 입고 질투와 복수에 나서는 걸로 봤죠. 많은 관객이 공감할 거예요."

극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는 여성을 배신하거나 사기를 치는 등 '찌질'하기 짝이 없다. 세 배우는 "21세기 한국 남자들만 그런 건 아니었다"며 웃었다. "타인과 관계 속에 있는 나 자신을 그냥 그대로 사랑하라는 게 결론입니다. 물론 훨씬 더 용기를 얻어야겠죠."

▷13일까지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공연 시간 85분, (02)334-5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