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한국을 노래로 이어준 고려인 성악가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6.02.22 03:28

[세상 떠난 국외 人士] 고려인 3세 소프라노 넬리 리

넬리 리 사진
'레닌그라드 최고의 여성 성악가'이자 '노래하는 민간외교관'이라 불린 구(舊)소련의 고려인 소프라노 넬리 리(Lee)가 지난해 12월 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1942년 2월 5일 러시아에서 태어나 림스키코르사코프 음대 및 레닌그라드 음악원을 졸업한 리는 조부모·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고려인 3세 성악가이다. 빼어난 목소리로 28세 때인 1970년 구소련 성악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음악원 재학 당시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등 주역을 맡아 이름을 날렸다. 소련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서독·프랑스·핀란드·네덜란드 등지를 순회하며 로제스트벤스키, 박탕 조르다니아, 시모노프 등 러시아의 쟁쟁한 지휘자와 협연해 러시아공화국 예술훈장을 받았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같은 세계 정상급 교향악단들과 한 무대에 서면서 소련 및 유럽 언론으로부터 '섬세한 테크닉, 세련된 무대 매너, 음악뿐 아니라 시(詩) 자체에 대한 심오한 해석은 모든 청중을 압도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리에게 작품을 헌정한 러시아 작곡가 슈니트케는 생전 '그녀가 내 곡을 노래하는 매 순간, 다음 연주가에게 음악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극찬했다.

리는 조국을 향한 향수와 애정도 지극했다. 1988년 9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조선일보사 주최로 열린 88 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서 차이콥스키 가곡 '별들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네' '카나리아' '라일락' 등을 부르며 고국 청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날 따뜻한 소리, 가슴을 파고드는 정감, 섬세한 몸짓으로 감동의 무대를 선사했다. 동포들에게 모국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던 리는 이날 무대에서 분홍 바탕에 세 가지 색 태극무늬를 수놓은 한복을 입고 예정에 없던 우리 민요 '뱃노래'와 최영섭 작곡 '그리운 금강산'을 열창해 객석을 눈물로 적셨다. 1991년 11월 조선일보사와 세종문화회관이 공동주최한 제3회 한국 가곡제에서도 '신아리랑'과 '그리운 금강산'을 불러 또 한 번 청중 가슴을 파고들었다.

리는 후학 지도에도 관심이 많았다. 유럽을 누비는 연주 활동 틈틈이 1990년 연세대를 시작으로 숙명여대·한양대·한국예술종합학교·서울대 등 국내 대학에서 초빙교수 혹은 석좌교수를 지내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고국의 나무와 풀을 사랑했고 한국과 러시아를 잇는 민간 외교관이길 바랐던 넬리 리는 청아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천상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