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한 '대학로의 전설'… 연기란 이런 것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6.02.04 03:00 | 수정 : 2016.03.04 13:54

- 이윤택 연출劇 '바냐 아저씨' 주연 배우 기주봉·김지숙
중장년 관객 장사진… 연장 공연
奇 "내 삶 비춰 바냐의 감정 표현"
金 "6㎏ 빼느라 목소리도 안나와"

"세상에, 어떻게 저런 연기를…."

지난 2일 밤, 우연히 기자 옆자리에서 연극 '바냐 아저씨'(안톤 체호프 작, 이윤택 연출)를 본 배우 예지원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무대 인생 40년, '대학로의 전설'이라 할 만한 기주봉(61)과 김지숙(60), 두 배우의 부활은 실로 전율이 느껴질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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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바냐 아저씨’에서 여주인공 옐레나 역을 맡은 김지숙(왼쪽)과 바냐 역의 기주봉. 이들은“관객이 점점 많이 들어 더 욕심이 난다”며“아직 우리 실력의 70%밖에 보여주지 못했다”고 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오랜 세월 공들여 일군 시골 땅을 하루아침에 팔아넘기려는 매제 앞에서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어! 이 나이가 되도록 진정한 삶이 없었어"라고 울부짖는 바냐 역 기주봉의 끓어오르는 연기에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담겨 있는 듯했다. 마을 의사가 키스하자고 조르자 "까짓 거, 평생에 한 번인데"라며 눈에 힘을 주는 옐레나 역 김지숙의 우아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연기는 곰삭은 홍어 같았다.

"한 달 만에 몸무게 6㎏를 빼느라 물만 마셨더니 처음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김지숙) "연습하느라 정신없어서 수염을 못 깎았는데 나름대로 배역에 어울리더라고요."(기주봉) 공연이 끝난 뒤 만난 두 주연 배우가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냐 아저씨'는 나이 들도록 일만 하다가 매제에게 배신당하고 매제의 새 아내에게 때아닌 연정에 빠져 방황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두 배우는 "끊임없는 시련을 인내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란 걸 가르쳐 주는 연극"이라고 했다.

이번 '바냐 아저씨'는 연극계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1980~1990년대 옛 대학로의 부활을 보는 듯, 머리 희끗희끗한 배우들이 오랜만에 현역으로 돌아와 무대 위에서 활력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견연극인 창작집단'의 예술감독인 김지숙은 "이윤택씨를 연출가로 영입한 게 '신의 한 수'였다"고 했다.

배우 조련사로 유명한 이윤택은 "제 잘난 맛에 사는 '꼴통'들한테서 절실함을 끌어냈다. 그건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거였다"고 했다. 나이 든 배우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는 현실에서, 그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옛 시절의 실력을 'HD 화질급'으로 되살렸다. 삶을 냉소하는 의사 역 곽동철, 오만한 교수 역 고인배, 회한의 감정을 켜켜이 쌓아놓은 듯한 이용녀·이봉규의 연기는 대사가 흘러나올 때마다 관객을 감탄시켰다. 문학전집 속 고전이 살에 닿는 듯한 현실 속 배신과 치정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김지숙은 '로젤' '뜨거운 바다'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였으나 2007년 '졸업' 이후 9년 동안 무대에 서지 않았다. "이 나이에 젊고 예쁜 역할을 맡는다는 게 처음엔 민망했어요. 하지만 도도함과 사랑스러움을 함께 보여주는 복합적인 연기로 승부했습니다." '관객모독' '리어왕' 등에서 주연을 맡았던 기주봉은 한동안 여러 영화의 조연으로 더 익숙했다. "분노와 열정을 동시에 품고 있는 바냐의 감정을 보여주려고 지나온 제 삶을 떠올렸어요. 1·2막을 담백하게 풀어서 연기하니까 3막에서 순식간에 에너지가 생기더라고요."

김지숙은 기주봉을 "늘 자유로운 영혼을 안은 채 무대에 서는 배우"라고 했고, 기주봉은 "젊을 때 발랄함과 도전 정신이 여전히 살아있다"며 김지숙을 칭찬했다. 후배 배우들에 대해선 "대사의 맛을 어떻게 내는지 와서 좀 봐 달라"(기주봉) "스스로에게 감동받고 나서 무대에 서야 한다"(김지숙)는 충고의 말을 전했다. '바냐 아저씨'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중·장년 관객들이 매회 극장 앞에 길게 줄을 늘어선 끝에 연장 공연이 결정됐다. 배우와 관객 모두가 연륜(年輪)의 묵직한 가치를 새삼 깨닫고 있다.

▷연극 '바냐 아저씨' 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16일~3월 10일 SH아트홀, (02)765-9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