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를 죽이려 하는가"

  • 부산=김미리 기자

입력 : 2016.02.03 03:00 | 수정 : 2016.03.04 13:53

- 僞作 입장 밝힌 이우환 화백
"조국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격앙
"위작품 자체 직접 본 적도 없어… 이번 논란의 최대 피해자는 나"

미술계 "초기 대응 미흡 아쉬워"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작가한테 어떻게 조국이 이렇게 대할 수 있습니까."

이우환(80) 화백이 최근 자신을 둘러싼 위작 논란과 관련해 억울한 심정을 쏟아냈다. 2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스테이징 필름' 개막식 참석차 부산을 방문한 이 화백은 기자에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조국이 왜 자꾸 나를 죽이려는가" 하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 화백은 지난달 27일 사석에서 기자와 마주쳤을 땐, "그들이 마음대로 유령을 만들어 놨다. 유령이 없다고 해도 믿지를 않는데 내가 뭐라 말하겠는가. 난 일절 대응 안 하겠다"고 했다.

이우환 위작 유통에 대한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일본에서 일시 귀국한 이 화백이 한국 사회에 강한 불신을 표했다. 이 화백은 2일 법률대리인인 최순용 변호사를 통해 배포한 보도자료에선 "최대 피해자는 작가 본인"이라고 항변했다. "위작품 자체를 직접 본 적 없고, 가짜라고 논란이 되고 있는 작품들은 작가의 손을 떠난 지 30~40년 전의 것들이라 이후 어떤 경로로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는데" 작가에게 자꾸 입장을 묻는 게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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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 이우환 화백이 부산 해운대구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스테이징 필름’전(展) 개막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언론과의 접촉을 피해오던 이 화백은 지난달 25일 "일부 인터뷰 내용이 내가 말한 것과 달리 보도되고 있다"며 최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선임하고 그를 언론 대응 창구로 삼았다. 대중의 관심이 커지자 '모르쇠'로 일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날 이 화백은 "'내가 보고 확인한 작품 중에는 위작이 없다'고 말했는데 '내 작품은 위작이 없다'는 식으로 보도됐다"며 "불행히도 다른 작가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우환 작품도 위조품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위작 존재 가능성을 처음 인정한 것이다.

이우환은 명실상부 현존하는 한국 대표 작가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개인전(2011년), 파리 베르사유궁 개인전(2014년) 등 세계적 거장의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그가 암초를 만난 건 4년 전쯤이다. 2012년 중반, 초기작으로 가격대가 높은 1970년대 후반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시리즈 100~200점이 미술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서다.

지난해 6월 경찰이 이우환 위작이 유통된다는 첩보를 입수해 수사하면서 이 문제는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경찰은 위작 유통과 관련해 지금까지 총 4차례 연루 의혹이 있는 단체와 화랑을 압수 수색했다. 지난해 8월 한국미술품감정협회를 시작으로, 두 달 뒤인 10월엔 위작 유통 의혹을 받고 있는 인사동 K화랑, 12월엔 부암동의 C화랑을 압수 수색했다. 지난해 12월 K옥션 경매에서 4억9000만원에 거래된 이우환 1978년작 '점으로부터 No.780217'의 감정서가 위조된 것과 관련, 올 초 K옥션도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이 화백과 미술품감정협회 간 갈등설도 불거졌다. 2012년 말~2013년 초 감정협회가 위작으로 본 몇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진짜'라고 말하면서부터였다. 진위에 대한 이견이 커지자 감정협회는 2013년 2월 이 화백의 작품 감정을 중단했다. 이후 이 화백은 직접 확인서를 써줬고, 2013년 10월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과 신옥진 부산공간화랑 대표에게 감정 위임서를 써줬다. 그러나 이날 보도자료에서 이 화백은 "수년간 수십 점 정도 확인해 준 것으로 기억되며 선의로 그때그때 확인해 준 것이어서 별도의 리스트는 작성하지 않았다"며 "작가는 감정서를 발급하는 기관이 아니다"고 했다. 최근 1970년대 후반 작품 중 일련번호가 같은 작품이 발견된 것과 관련해선 "오랜 기간 일본, 한국, 프랑스를 오가며 작업했기 때문에 같은 번호가 두 번 이상 겹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진위 판단의 기본 자료가 되는 전작(全作) 도록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이 화백은 "현재까지 경찰로부터 공식적인 협조 요청을 받은 적은 없지만 경찰에서 위작품으로 의심되는 작품을 봐달라는 요청이 오면 성심껏 봐줄 것"이라고 했다.

한 미술계 인사는 "위작 얘기가 나왔을 때 작가가 안일하게 초기 대응을 한 게 아쉽다"며 "뒤늦은 해명 노력이 논란을 잠재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