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덜어내고… 하루하루 나아갈래요"

  • 파리=유석재 기자

입력 : 2016.01.21 03:00 | 수정 : 2016.01.21 06:08

- 파리오페라발레단 박세은
주역 꿰차며 승승장구했지만 넉달 전 연습 때 얼굴에 큰 부상
올 新作발레 '끝나가는 밤' 출연

지난주 프랑스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극장 앞에서 만난 발레리나 박세은(27)의 두 눈 사이로 이마에서 콧등까지 긴 살구색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밝은 표정이었지만 어딘가 우울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2011년 한국 발레리나 최초로 세계 정상급 파리오페라발레단(BOP)에 입단해 주목을 받았던 그는 지난해 여름 이후엔 전혀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15년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해였어요…." 준단원으로 시작해 군무진인 카드리유(5등급)와 코리페(4등급)를 거쳐 2013년 쉬제(3등급) 승급을 했고, 2014년에 프랑스 고전 발레 '라 수르스' 주역까지 맡는 등 승승장구했던 박세은이었다.

(왼쪽 사진)지난주 파리에서 만난 박세은이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 앞에서 발레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박세은이 지난해 파리오페라발레단의‘백조의 호수’공연에서 주역인 오데트 역을 맡은 모습.
(왼쪽 사진)지난주 파리에서 만난 박세은이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 앞에서 발레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박세은이 지난해 파리오페라발레단의‘백조의 호수’공연에서 주역인 오데트 역을 맡은 모습. /유석재 기자·안 레이 사진
넉 달 전, 여성 무용수 4명이 부츠를 신고 춤을 추는 현대무용풍의 발레 '안 테라사 드 키스메이커' 연습 때였다. 손으로 땅을 짚고 뒷다리를 드는 동작에서 앞 무용수의 신발 굽이 박세은의 이마를 강타했다. "너무 아파서 '악!' 소리를 지르고 바닥에 굴렀어요. 피가 분수처럼 흘러 바닥이 흥건했죠. 동료들은 비명을 지르고 울고…."

이마가 세로로 6㎝ 찢어졌다. 앰뷸런스로 실려간 병원에서 성형외과 전문의 3명이 달라붙었다. 자칫 시력이 상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고, 무용수로서의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닌가 우려될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하지만 얼굴이 퉁퉁 부은 상태에서도 반창고 붙인 채로 이 공연 무대에 섰다.

액운(厄運)은 겹쳤다. 지난해 11월 4일 발레단 정기 승급 심사를 마친 박세은은 "100% 다 보여줬다"며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2등급인 프리미에르 당쇠르로 올라간 승급 명단에 박세은의 이름은 없었다. 첫 탈락의 쓴맛을 본 그는 "말도 안 돼"라며 허탈해했다. 9일 뒤 파리 연쇄 테러 때는 숙소 근처에서 폭발 사고가 났으나 외출 중이어서 다행히 화를 면했다.

하지만 그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많았다. 전설적인 발레 교육가 질베르 마이예(Mayer·82)는 편지를 써써 "표현, 발끝 사용, 음악성 등 모든 게 완벽했다"는 찬사를 보냈다. 벵자멩 밀피예(Millepied·39) BOP 예술감독은 "승급 같은 거 의미 없도록 앞으로 주역을 많이 주겠다. 넌 미래의 에투알(1등급 무용수)이니 조금만 기다려라"고 했다. 엄마는 "세은아, 인생은 마라톤이야"라는 문자를 보냈다.

'클래식과 모던 발레에서 모두 뛰어난 표현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듣는 박세은은 다음 달 5일 밀피예의 신작 '라 뉘 사셰브(끝나가는 밤)' 무대부터 올해 일정을 시작한다. 아픔을 떨쳐낸 2016년의 새로운 도약이다.

"제가 너무 욕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하루하루 더 나아가는 것, 기다리는 것, 그리고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이제 알게 됐어요. 어느 상황에서든지 제가 최선을 다해 잘하면 되는 게 아니겠어요?" 타향에서 6년째 홀로 지내는 젊은 발레리나의 환한 얼굴 속에 절치부심의 각오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