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서 외면당한 시인 백석의 고뇌 노래하다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6.01.07 03:00 | 수정 : 2016.02.29 13:51

연극 '백석우화' 주연 오동식 "원룸 칩거 경험, 연기 도움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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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백석우화’의 주연을 맡은 오동식이 1962년 북한에서 마지막 작품인 이솝 우화 이야기를 발표하는 시인 백석을 연기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검은색 중산모를 쓰고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배우 오동식(44)이 무대 위에 서서 이솝 우화를 이야기했다. "세상의 모든 언짢은 일들이 다 이 조그만 혀끝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긋하고 정겨운 평안도 말투로 우화 낭독을 끝낸 뒤 '이런 글을 왜 쓰느냐'는 질책을 받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더 이상 쓸 게 없습니다." 막막한 표정 속에 한 가닥 강렬한 저항의 눈빛이 스쳐갔다.

그가 연기한 인물은 근대문학사의 대표적 시인 백석(白石·1912~1996). 이 이솝 우화는 백석이 1962년 북한에서 발표한 마지막 글이었다. 연극 '백석우화'(이윤택 작·연출)의 주연을 맡아 지난해 10월 첫 무대에 선 오동식은 '남과 북에서 모두 외면당했던 시인의 고뇌를 고스란히 끄집어낸 열연'이란 찬사를 들었고, 연말 대한민국 연극대상의 연기상을 받았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오동식에 대해 "극의 전체 흐름 속에서 자기 배역을 볼 줄 아는 배우"라고 말했다.

"만나는 분마다 '당신이 그렇게 연기를 잘할 줄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오동식은 연극계에서 오래도록 배우보다 '스타 조연출'로 알려졌었다. 연극 '에쿠우스'에서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까지 숱한 공연에서 조연출로 활약했고, 연기는 가끔 빈자리가 나면 하는 식이었다. 청주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연극판에 뛰어든 뒤 2008년 극단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간 그는 어느 순간 지쳐 버려 7개월 동안 연극판을 떠나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이번 작품에서 살아났다.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일제 말 만주를 유랑하다 피폐해진 백석이 광복 직후 압록강 남쪽 허름한 방에 칩거해서 쓴 '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을 그가 판소리로 부를 때, '모던 보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진 지식인 백석의 처절한 고뇌와 고독이 극장을 아프게 채웠다. "저도 연극을 쉴 때 회기동 원룸에 틀어박혀 지냈거든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번 연극을 위해 그는 혼자 판소리 연습을 하면서 백석에 대해 공부했다. "아름다운 시 속에 깊은 슬픔이 들어 있었습니다. 말하고 싶은 게 속에 많이 들어 있으면서도 말하기를 수줍어하는 평안도 사람…. 연극 뒷부분에서 그가 강압 때문에 거친 언어로 대남방송을 할 때는 제가 벌거벗는 느낌이었어요." 이 장면에서 오동식은 객석에서 차마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들끓는 좌절과 자책(自責)의 연기를 쏟아낸다. 그는 차기작 '길 떠나는 가족'에선 구상(具常) 역할을 맡는다. 또 이북 출신 시인 역이다.

▷연극 '백석우화' 17일까지 혜화동 게릴라극장, (02)763-1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