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봐야 보인다, 이 그림도 그렇다

  • 김미리 기자

입력 : 2015.12.30 01:09

[세필로 그리는 서양화가 김홍주]

굵기 1㎜ 붓으로 수만 번 칠해…
사실적인 대상 드러내기보다 '그리다'는 행위 자체에 집중

김홍주 2013년작 ‘무제’. 한 덩이처럼 보이지만 가는 세필로 수십만 번 붓 터치를 해 긁어내듯 그린 그림이다.
김홍주 2013년작 ‘무제’. 한 덩이처럼 보이지만 가는 세필로 수십만 번 붓 터치를 해 긁어내듯 그린 그림이다. /국제갤러리 제공

한 발, 한 발 다가갈수록 커다란 물감 덩어리 안에 꼭꼭 숨은 붓 터치가 솜털처럼 한 올, 한 올 일어난다. 한 땀, 한 땀 자수하는 아낙처럼, 굵기 1㎜ 채 안 되는 가는 붓으로 긁어내듯 수만 번 칠한 흔적이다. 그저 곱겠거니 했던 그림이 담은 거친 노동의 결. 서양화가 김홍주(70)의 그림은 이런 반전이 맛이다.

"의미요? 그저 게임하듯 그리는 겁니다(웃음)."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작가 김홍주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돋보기 끼고 캔버스에 거의 붙다시피 해서 하는 정교한 작업을 수십 년 했다. 창작의 고단함이 육체에 축적돼 요사이 부쩍 눈이 침침해졌단다.

김홍주를 대표하는 수식은 '꽃의 화가'다. 캔버스 가득 꽃송이를 큼지막하게 그려 놓고 세필 터치로 꽃잎의 섬유질까지 표현하는 '김홍주표 꽃'은 서울 신라호텔 로비, 기업 사옥 로비에서 종종 보이는 인기 작품이다. 그런데 5년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엔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꽃 그림이 없다.

"꽃요? 이젠 지겨워서요. 그리는 사람이 지겨운데 보는 사람은 얼마나 더 지겹겠어요?" 농담부터 뱉었지만 진짜 속마음은 따로 있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기보다 '그리다'는 행위 자체에 더 집중한 결과 꽃이라는 구체적 사물을 버리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를 '묘사를 포기한 세필화'라 칭한다. 1970년대 실험 예술을 탐구한 'S.T 그룹' 참여와 1980년대 초 극사실주의를 거쳐 마침내 찾은 자신만의 기법이다.

전시장에 걸린 신작에선 형태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에서 영감 받아 그렸다는 그림에선 금강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금강전도를 어렴풋이 그린 다음 그 위를 바늘처럼 가는 붓으로 산등성이를 긁어내듯 그린 결과다.

자세히 보면 그의 그림엔 위아래, 좌우가 없다. 위에서 아래로 그린 그림을 거꾸로 걸기도 다반사. 형태는 무시하고 그림 속을 채운 시간을, 땀을 봐달라는 아우성과도 같다.

캔버스 앞에서야 겨우 보이는 작은 붓질들이 속삭인다. 숲 속 나무 밑둥치에 낀 이끼가 있기에 숲이 존재한다고, 수많은 민초(民草)가 있기에 거대한 세상이 있다고. 전시 내년 1월 24일까지.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