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풍자한 뮤지컬, 이리 통쾌할 수가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5.12.24 00:38

[뮤지컬 리뷰] 오케피

'쌍천만 배우' 황정민 주연·연출, 올해 라이선스 신작 중 돋보여
클래식·재즈·힙합·창가까지… 다양한 삽입곡, 재치있는 가사

"나 정말 완전 싫어, 뮤지컬! 왜 갑자기 노래를 부르냐고. 간단하게 말로 하면 30분이면 끝나는 별거 아닌 이야기." "춤 안 추고 가뿐하게 걸어가면 30초 만에 갈 수 있잖아." 원 세상에, 뮤지컬이라는 공연 양식 자체를 이렇게 사정없이 풍자하는 이 공연의 정체는 무엇인가? 바로 올 연말 시즌 대형 뮤지컬 중 유일한 신작인 '오케피'(미타니 고키 원작, 황정민 연출)다.

올해 영화계 '쌍천만 배우'의 지위에 오른 황정민의 최대 관심사는 사실 이 뮤지컬이었다. 제작은 아내인 김미혜 샘컴퍼니 대표가, 연출은 자기가 직접 팔을 걷어붙인 데다 주연인 지휘자 역(오만석과 더블캐스트)까지 맡았다. 하지만 '웃음의 대학' 등 지적이면서도 냉소적인 희극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 미타니 고키(三谷幸喜)가 뮤지컬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스타 배우 조승우의 출연이 무산된 것도 불안감을 키웠었다.

배우 황정민(맨 위)이 주연과 연출을 맡은 뮤지컬 ‘오케피’는 지휘자와 연주자 12명의 일상적이지만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극화한 작품이다.
배우 황정민(맨 위)이 주연과 연출을 맡은 뮤지컬 ‘오케피’는 지휘자와 연주자 12명의 일상적이지만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극화한 작품이다. /샘컴퍼니 제공

지난 주말 마침내 뚜껑을 연 이 뮤지컬은, 한마디로 엇비슷한 메뉴에 식상한 뮤지컬 식단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 뜻밖의 별미(別味)였다. 그렇다. 뮤지컬이라고 해서 반드시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이야기만을 해야 한다고 누가 정해놓기라도 했던가? '오케피'란 '오케스트라 피트(orchestra pit)', 무대 아래 연주를 하기 위해 파놓은 공간의 일본식 약어다. 화려한 뮤지컬 공연에서도 빛을 보지 못하는 공간. '오케피'는 그 신기할 것 없이 평범하면서도 저마다 독특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휘자와 12명의 악기 연주자는 다른 앙상블(조연 배우) 없이 그 모두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허세 가득한 지휘자는 사실 아내 '바이올린'(최우리)과 별거 중이면서 '하프'(린아)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고, 바이올린은 새 애인 '트럼펫'(최재웅)과 헤어진 사실을 숨기고 있다. '피아노'(문성혁)는 연주가 조금 복잡해지면 연주 흉내만 내고, 무뚝뚝한 '오보에'(김태문)는 오래전 헤어진 딸과의 재회에 아파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이 끝에 가선 모두 하나로 조화돼 장엄한 결말을 이루겠거니 생각하면 오산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극중 뮤지컬이 끝나면서 그냥 진행을 멈춘다. 마치 사람들의 실제 일상처럼.

첫 노래가 15분 만에 나올 정도로 대사가 많지만, 음악을 다룬 뮤지컬답게 삽입곡도 만만찮은 매력을 갖추고 있다. 클래식, 재즈, 힙합, 발라드에서 고전 뮤지컬, 창가풍의 노래까지 골고루 등장하는데, 더 재미있는 것은 가사다. "고양이가 두 발로 걸어다니고"(캣츠) "가면 쓰고 여자한테 노래시키고"(오페라의 유령) "주사 맞고 갑자기 성격 바뀐"(지킬 앤 하이드)다며 유명 뮤지컬을 희화화하더니 "뮤지컬은 1막 끝나고 집에 가도 돼, 2막은 별 내용 없으니까"라고 말하는 데선 배를 잡을 만하다. 올해 초연 라이선스 뮤지컬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 연말에 비로소 나왔다.

▷내년 2월 28일까지 LG아트센터, (02)6925-5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