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5.12.08 03:00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남경주]

오랜만에 뮤지컬 주연 맡아… '한국말 하는 게이블' 찬사도
"하루 12시간 연습해도 쌩쌩해"

"솔직히 말해서, 이젠 내 알 바 아니야."

회한(悔恨)을 꾹꾹 눌러 담은 나지막한 목소리에 옛 '주말의 명화' 주인공처럼 성대에 기름을 친 듯한 유려함이 깃들어 있었다.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마거릿 미첼 원작, 한진섭 연출)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 레트 버틀러 역을 맡은 남경주(51)가 이 유명한 대사를 읊은 뒤 아내 스칼릿을 뿌리치고 무대를 떠나자 객석 곳곳에서 탄식이 일어났다.

'오빠'가 돌아왔다. 국내 뮤지컬계의 최정상 스타였던 남경주가 오랜만에 대형 작품의 남자 주인공을 맡은 것. 그는 이 작품에서 스칼릿 역의 바다, 김소현, 김지우와 돌아가며 로맨스 연기를 펼친다. 노래를 부를 때는 여전히 청아한 목소리에 진중한 관록이 묻어났다. "진짜 레트 같다" "한국말을 하는 클라크 게이블"이라는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남경주는 “딸 보니가 죽는 장면이 가장 어려웠다. 슬픔을 오히려 절제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경주는 “딸 보니가 죽는 장면이 가장 어려웠다. 슬픔을 오히려 절제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상훈 기자
"아직도 주인공으로 불러 주셔서 감사하죠. 뭐, 하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후배들하고 공연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개막 전 만난 남경주는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들고 있었다. 형광펜으로 대사마다 줄을 긋고 잔글씨로 메모하느라 종이 위엔 흰 부분이 없을 지경이었다. "레트는 노예제, 소작농, 권위주의 같은 남북전쟁 당시 남부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던 인물입니다. 방탕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양심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이죠. 자유로운 스타일이 저하고 많이 닮은 점도 있어요." 현직 대학교수(청운대 뮤지컬연기학과)다운 학구적인 분석이 이어졌다.

지금이야 김준수와 조승우가 뮤지컬 티켓 파워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 가운데 숱한 아이돌이 무대에서 명멸하고 있지만,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남경주의 인기에 필적할 배우가 거의 없었다. 1984년 '대춘향전'으로 뮤지컬에 데뷔한 그는 '아가씨와 건달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등에서 무대를 휘어잡았다. 지방 공연을 가면 경호원 없이는 다닐 수도 없었고, 팬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옷이 찢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46세 때인 2010년, 뮤지컬 '맘마미아!'에서 중년 세대인 샘 역할을 맡게 됐다. 초연인 2004년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배역이었다. "이제 나이 먹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니까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그 뒤엔 '라카지'에서 게이 주인공의 남편 역, '위키드'의 마법사 역 등 진중한 조연으로 나와 작품을 든든히 받쳐 주는 일이 많았다.

남경주는 오는 16일 개막하는 '넥스트 투 노멀'에서 가장(家長)인 댄 역할을 맡아 박칼린·정영주와 공연한다. 같은 기간 뮤지컬 두 작품에 겹치기 출연하는 것이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아닐까? "천만에요. 하루에 12시간 연습을 해도 지치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3~4회 헬스장을 찾거나 유산소 운동을 하고, 발레와 탭댄스도 연습한다. 그건 20대 때부터 계속된 '프로의 생활 습관'이었다.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내년 1월 31일까지 잠실 샤롯데씨어터, 1577-3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