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선명한 초상화들이 완성한 풍경화, 뮤지컬 '레미제라블'

  • 뉴시스

입력 : 2015.11.30 09:39

2년 만에 돌아온 라이선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이 새삼 일깨워준다. 한국에서 총 5권, 2400쪽의 방대한 분량(민음사 판)으로 출간된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동명소설을 160분(인터미션 20분 제외)으로 얼마나 잘 압축했는지, 주·조연들의 캐릭터가 모두 입체적으로 살아 있는 명작이란 무엇인가를.

28일 저녁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개막한 '레 미제라블' 서울 공연은 캐릭터들의 초상이 생생히 모자이크된 잘 그려진 대서사시 풍경화였다.

무대는 무엇보다 배우의 예술. 아무리 잘 차려진 성찬이라도 배우들이 잘 만들어진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맛있게 먹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다. 특히 '레미제라블'은 거의 모든 대사를 노래로 표현하는 '송 스루'인 데다가 묵직한 감정연기까지 해야하는 터라 배우들에게는 난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번에 한국에서 처음 '장 발장' 역을 소화한 양준모는 특히 미식가 겸 대식가였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옥살이를 한 뒤 자신을 평생 추적하는 경감 '자베르'를 피해다니는 궂은 운명의 '장발장'은 무대 위에서 신성한 노동을 하듯 정성껏 연기하는 양준모에게 맞춤 식단이었다.

2007년 예정됐던 '레 미제라블' 한국 라이선스 공연의 장발장 역 유력 후보 중 한 명이었다가 이 작품이 무산되면서 아쉬움을 간직했던 그는 올해 일본 도호 프로덕션의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을 열연하며 꿈을 이뤘고 마침내 한국 무대에 같은 역으로 오르게 됐다. 일본에서 장발장을 연기한 경험에 결혼 7년 만인 최근 얻은 첫 딸은 양준모에게 무한한 영감을 줬다. 장발장은 인생 후반부를 양딸인 '코제트'를 위해서만 사는데 그 심정이 자연스레 묻어났다.

바리톤 출신으로 내로라하는 그의 가창력은 말할 것도 없다. 이번에 특히 눈여겨볼 만한 지점은 테너로 음역대를 확실하게 넓힌 것이다. 자베르와 대치 상황에서 부르는 '더 컨프런테이션(The confrontation)'에서 분노할 때는 원래 그의 굵은 음성이 돋보였다. 특히 놀라웠던 것은 테너의 음성을 사용해야 하는 '브링 힘 홈'이었다. 코제트가 사랑하는 '마리우스'를 혁명 통에서 구하기 위해, 노년의 나이에도 직접 혁명군에 참여한 장발장이 부르는 노래로 맑고 고운 미성을 필요로 한다. 양준모는 마치 다른 목소리를 빌려온 듯 노래한다.

장발장이 자신도 모르게 외면해 위험에 빠뜨린 주인공이자, 코제트의 어머니인 '판틴' 역의 전나영도 빼놓을 수 없다. 네덜란드 교포 3세인 전나영은 2013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의 '레 미제라블'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판틴 역을 맡은 주인공이다. 네덜란드에서는 '미스 사이공'의 여주인공 '킴'을 연기한 바 있다. 그룹 'AOA' 설현과 미스코리아 출신 이하늬의 얼굴이 언뜻 보이는 전나영은 한국 무대 데뷔작인 '레미제라블'에서 절정의 감정 연기를 선보인다. 뮤지컬에서 노래는 곧 감정인데, 그녀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고난의 연속인 판틴에 절절함과 동정심을 부여했다.

장발장과 맞서는 운명적인 숙적 자베르의 김우형도 놀랍다. 이 작품의 한국어 초연 시 혁명을 이끄는 학생 '앙졸라' 역을 맡었던 그는 이 역의 댄디하고 지적인 색깔을 말끔히 지우고 자신만의 신념으로 똘똘 뭉친 자베르를 호연하며, 장발장에 뒤지지 않는 존재감이 깃든 역으로 만들어냈다.

초연의 '에포닌' 역으로 각종 시상식에서 여우신인상을 휩쓴 배우 박지연이 이번에도 역시 에포닌이다. 마찬가지로 화려한 미모를 모자와 얼굴을 검게 칠한 분장으로 가린 채,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는 그녀의 심정을 이번에도 절절히 소화했다. 그녀의 애절한 넘버 '온 마이 오운'은 몇번씩 들어도 지겹지 않다. 사기꾼 콤비인 '테나르디에 부부' 역의 임기홍·박준면은 무거운 극에 익살스러움을 부여하는 리듬감이 탁월하다.

학생운동을 이끌며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혁명가 '앙졸라' 민우혁은 이번 작품으로 대형 뮤지컬에서도 통한다는것을 증명했고, 대학로의 떠오르는 뮤지컬 아이돌 중 한 명인 윤소호도 사랑과 혁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순수한 영혼 마리우스를 맡아 본래 자신의 강점을 뽐낸다. 마리우스와 풋풋한 첫사랑에 빠지는 코제트 역에는 처음으로 뮤지컬에 도전하지만 영국 제작진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신인 이하경이 데뷔작임에도 안정적이다.

지난 초연처럼 이번애도 뮤지컬 '미스 사이공'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로런스 코너가 연출한 2010년 25주년 버전으로 빠른 전개와 역동적인 무대 변환이 인상적이다. 다른 뮤지컬의 전범으로 여겨지던 '레미제라블' 특유의 회전 무대가 사라진 것에 대해 초연 당시 일부에서는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냈는데, 위고가 그린 삽화를 바탕으로 한 영상은 안정감을 갖췄다.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유화 '이삭 줍는 사람들'의 명암을 연상케하는 등 유럽 중세풍의 분위기를 오롯하게 자아낸 조명 톤 역시 볼 때마다 황홀경이다. 연출가 겸 변역가 최용수와 이번에 국내 협력연출을 맡은 홍승희가 번역하고 연출가 겸 극작가 조광화가 매만진 한국어 가사는 초연에 비해 다듬어져 한층 한국배우들 입에 감긴다.

관객들의 공감을 사는 데 방점을 찍는 것은 이야기다. 억울함으로, 분노로 점철됐던 장발장의 인생을 바꾼 것은 성당 주교의 자비와 은혜였다. 이후 코제트를 위한 삶을 사는 장발장 개인의 삶이 씨줄, 당시 프랑스 혁명기의 시대적인 상황이 날줄로 얽히고설키며 인류애의 메시지를 전한다.

프랑스대혁명 이후의 6월 혁명 시기 등을 다루는데, 앙졸라와 마리우스 등 젊은 혁명군의 모습은 나라와 시대를 불문하고 부조리한 사회로 내몰린 사람들의 감정을 투영할 수밖에 없다. 1막에서 이들을 비롯해 장발장 등 모든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얽히는 합창곡이자 상징적인 장면으로 자리매김한 '원 데이 모어'의 전율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번 겨울, 라이선스 뮤지컬 '오케피' 외에 초연작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레미제라블' 같은 작품이면 수차례 반복해도 수긍이 된다.

2012년 말 27년 만에 한국어 라이선스 초연 당시 용인을 시작으로 약 4개월 간 지방투어를 돌며 작품성을 다졌던 '레미제라블'은 이번 서울 공연에 앞서 대구 계명아트센터 무대에 올라 배우들의 호흡을 이미 다졌다.

2016년 3월6일까지. 한국어 초연 시 원 캐스트로 장발장을 소화한 뮤지컬스타 정성화, 한국어 버전 판틴 역의 초상을 만든 조정은도 이번에 돌아왔다. 2013년 일본 도호 프로덕션에서 장발장을 연기한 김준현이 이번에 자베르 역을 나눠 맡는다. 총괄 프로듀서 정지원, 책임 프로듀서 구본춘, 협력 프로듀서 김영인, 국내 음악감독 김문정, 제작·기술감독 유석용. 6만~14만원. 러닝타임 180분(인터미션 20분). 레미제라블코리아·인터파크시어터·KCMI. 02-547-5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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