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관록 있는 연주 위 섬세한 선율… 청중도 숨죽인 현장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5.11.25 00:51

발레리 게르기예프&뮌헨 필하모닉

온 삶을 피아노에 바친 음악가의 어제와 오늘을 지켜보고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23일 저녁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발레리 게르기예프&뮌헨 필하모닉' 내한 공연은 피아니스트 백건우(69)의 관록 있는 우아함과 섬세함을 압축해 보여준 무대였다.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황제’를 협연하고 있는 백건우.
2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황제’를 협연하고 있는 백건우. /빈체로 제공
화려하고 흔들림 없는 카덴차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 피아니스트는 특히 2악장에서 압도적인 연주를 펼쳤다. 트럼펫과 팀파니가 어우러지며 팡파르를 울리고 흥겹게 행군하는 앞의 악장과는 다르게,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은은하고 신중한 터치로 오케스트라와 주고받는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1990년대 중반 쉰 언저리에서 이 곡을 종종 연주했던 건반 위의 구도자는 고희를 앞둔 지금, 가슴속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커다란 웅덩이를 품게 된 사나이가 보여주는 깨달음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세르주 첼리비다케, 제임스 레바인, 크리스티안 틸레만, 로린 마젤에 이어 올가을부터 뮌헨 필하모닉 음악감독에 취임한 게르기예프(62)는 이 악단에 자신의 개성을 확실히 불어넣었다. 왼손가락을 나비처럼 잘게 날갯짓하는 가운데 감정을 온몸에 실어 선율에 얹었다. 독주자에게 여백을 충분히 내어주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오케스트라 차례에선 맘껏 터뜨리는 연륜이 돋보였다. 현의 움직임 사이로 빈틈없이 파고드는 목관도 매력적이었다.

중간 휴식 뒤, 백건우 연주의 여운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스산한 기운이 퍼졌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과 함께 빛바래고 서늘한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3악장에 접어들자 악기마다 파릇파릇 살아나서 공연장이 터져나갈 듯 생명의 열기로 가득 찼다. 이윽고 마지막 악장, 만개가 찬란할수록 시든 꽃잎은 추한 법이다. 그 위로 저릿하게 스미는 삶의 덧없음. 박력 충만한 이 러시아 지휘자는 단원들이 활놀림을 다하고도 15초 동안 정적을 안기며 천천히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청중들도 숨죽인 채 가만히 지켜봤다. 쉽게 만나기 어려운 오케스트라와 청중의 '협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