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1.09 21:25
실로 오랜만에 소개할만한 국악 공연 한 편이 등장했다. 오랜 연륜과 노력으로 빚어낸 수준 높은 공연은 대학로예술극장으로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크고 깊은 울림과 감동을 자아냈다.
퓨전국악의 선구자격인 그림(The林)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 '환상노정기'는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화첩기행을 떠난 조선시대의 전설적인 화가 김홍도의 여정을 따라간다. 금강산은 다 그렸지만, 호랑이를 그리지 못해 아쉬워하던 중 호랑이 떼의 습격으로 길을 잃고 일행과 떨어진 그는, 호랑이에게 물린 만덕이란 소년을 만나게 된다. 자기 아들을 똑 닮은 만덕이를 집에 데려다주려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목숨처럼 귀한 그림을 모두 잃게 된 김홍도. 과연 그는 그림을 찾고 호랑이까지 그려 어명을 지켜낼 수 있을까.

'환상노정기'는 별도의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판소리와 음악, 스크린에 비친 3D 영상만으로 어우러진 판타지 음악사극이다. 소리꾼(김봉영)은 김홍도가 됐다가 만덕이가 됐다가 하며 관객과 능수능란하게 한 판을 벌인다. 때론 힘차고, 때론 애절한 그의 연기는 하염없이 빠져들게 된다.
그렇지만 진짜 주인공은 음악과 영상이다. 각각의 악기들은 판소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고 주인공이 된다. 긴장감 넘치는 액션에서는 타악기(장경희)가, 김홍도가 그림에 미쳐 먼저 보낸 아들을 그리워하는 장면에선 거문고(윤희연)가, 전체적인 분위기는 관악기(정진우)가 솔로로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판소리가 펼쳐지는 동안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김홍도의 유명한 그림인 금강사군첩, 송하맹호도 등이 3D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난다. 바로 이 그림들을 그려가는 과정이 걸작이다. 먹색의 깊이와 농담, 붓끝의 결을 따라가는 섬세한 시각적 터치는 음악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기묘하게도 소극장을 동양화 가득한 화랑으로 변모시킨다. 극의 배경이 되는 금강산 역시 한 폭의 수묵화가 되어 넘실넘실 살아 움직인다.
짧은 이야기를 마치고, 마지막에 이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조화와 감동은 작은 극장으로 담아내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마무리는 태평소가 맡았다. 크고 강렬한 태평소 소리에 한껏 감동으로 달아오른 관객들의 가슴은 부풀어 터져 나갈 듯 했다. 그럼에도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음악감독(신창렬)의 말은 높은 수준의 이유를 가늠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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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무대가 어울리는 작품을 이렇듯 작은 무대에 올릴 수밖에 없는 게 국내 공연계의 현실이다. 아쉬우나마 공중파를 통해 일부 공연이 재현되었으니 꼭 한 번 살펴보시라. 공연이 아니더라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그림의 음악은 '국악은 지루하다'는 편견을 깨끗이 날려줄 것이다. 앨범은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