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박정자·손숙, 너 늙어봤니 나 젊어봤다…연극 '키큰세여자'

  • 뉴시스

입력 : 2015.10.05 09:45

연극계 두 대모가 7년 만에 한 무대에 올랐다. '불꽃 튀는 연기 대결'이라는 상투어 만으로는 모자라다. 배우 박정자(73)와 손숙(71)은 박정자의 말마따나 전우(戰友)다. 3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키 큰 세 여자'는 무대라는 전장에서 함께 '늙어갈 용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늙어감'은 언제나 관심사다. 적극적으로 노화에 맞서는 게 최근 흐름이다. 상반기 화제가 된 책 제목도 '늙어갈 용기'였다. 미국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87)의 작품인 '키 큰 세 여자'는 죽음을 앞둔 노인의 모습을 통해 '인생은 죽음이 있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원로 배우가 희귀한 데다 그들이 설 무대마저 부족한 상황에서 박정자·손숙은 축복이다. '키 큰 세 여자'로 세 번째 퓰리처상(1994)을 받은 올비는 한국 내 두 사람의 존재감을 전해 듣고 캐스팅에 만족을 표했다.

올비가 자신과 양어머니의 오랜 세월에 걸친 불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희곡이다. 제목 역시 키가 컸던 그의 양어머니에서 따왔다.

소멸해 가는 동시에 파편화된 기억으로 인해 변덕과 심술이 끊이지 않는 92세 노인을 52세 중년 여성과 26세 아가씨가 간병하고, 대화하고, 다투는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인 1막은 '리얼리즘' 성향이 짙다. 2막은 52세 중년과 26세 아가씨가 92세 노인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표현주의'로 승화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따로 없다. 92세 노인은 A, 52세 중년은 B, 26세 아가씨는 C다.

2막에서 A와 B는 우리가 된다. 삶이 영원할 것처럼 살고, '쪼그라들기 전'인 C를 향해 '우리'는 "그랬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철 없이 구는 C를 향해 B가 "스물여섯살에서 쉰두살로 나이가 두배가 되면 즐거움과 기쁨도 두배가 될 것 같느냐"고 꾸짖을 때 A 역시 공감의 눈빛을 보낸다.

단수의 캐릭터가 복수의 캐릭터로 되는 마술이 지나면 박정자·손숙, 복수의 두 배우가 단수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느낀다. 두 배우는 비슷한 연배인데 박정자는 스무살 많은 A, 손숙은 스무살 가량이 적은 B를 연기한다. A는 손숙의 미래요, B는 박정자의 과거다. 무대 위와 현실의 시간은 뒤섞이며 배우들의 삶도 평평하게 만든다.

'키 큰 세 여자' 속 주인공은 '키가 크고 강해' 트라우마가 생기고 상처를 입는다. 키가 작고 애꾸눈이었던 그의 남편은 성적인 부분에서도 그녀 앞에서 무력했다. 주인공의 말을 빌리면, "남자라서 당연히 바람을 피웠지만" 그런 심리적인 근원에 그 요소를 배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펭귄을 닮았지만 부자인 남편에게 진정 사랑을 받지 못한 A 또는 B 또는 C는 동성애자인 아들과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비롯한 주변사람들과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처로 요약될 수 있는 주인공의 키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키 또는 트라우마가 있다. '키 작은 세 남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여성만이 아닌 누구에게나 가닿는다. 이병훈 연출의 세심한 매만짐이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든다. 개막 전부터 박정자·손숙 출연으로 중장년층 예매율이 높았다. 하지만 오히려 젊은 관객이 더 들어야 할 법한 연극이다. 삶은 더 처절해지는데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위로만 넘치고, 늙어갈수록 잔인해지는 현실을 알려주는 이 없어 젊은이들은 매번 당하지 않는가. B는 태어난 직후부터 죽어가는 것이라며 여섯살 때부터 죽음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는 자문에 '멈추는 순간' '멈출 수 있게 되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A·B·C의 동어 반복은 죽음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삶을 긍정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청년들이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그에 대해 씩씩하고 굳센 기운을 받아갈 수 있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새로 표방하는 '배우중심 연극'의 첫 번째 작품인데 그 돛을 잘 달았으니 순항만 남았다. 박정자·손숙이라는 탁월한 선택 사이에서 분투한 C인 국립극단 시즌단원 김수연(35), 대사 하나 없지만 어느새 흔적을 남긴 아들 역의 허민형(28)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항상 극의 감정을 가만히 머금고 있는 무대디자이너 박동우의 보랏빛 무대 또한 이번에도 조용히 빛난다.

25일까지. 색소폰 연주자 최관식, 조명 이동진, 의상 송은주, 드라마투르그 이은기. 17세 이상 관람가. 120분(인터미션 15분 포함). 1만(소년소녀 티켓)~5만원. 국립극단.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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