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사랑 잃은 남자, 몽환의 빌딩숲을 맴돌다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5.09.20 23:43

바늘과 아편

무대 예술이란 상상하는 모든 것을 현실로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 공연이었다. 고독한 인간의 심상(心狀)이 이미지와 결합해 심상(心像)으로 발전하고, 그것에 테크놀로지를 입힌 뒤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를 금상첨화 격으로 넣었으니, 연극 '바늘과 아편'의 공연 시간 95분은 그대로 몽환적인 시각 경험이 되기 충분했다.

회전하는 입방체 형상의 무대를 통해 몽환적인 이야기를 펼치는 연극 '바늘과 아편'.
회전하는 입방체 형상의 무대를 통해 몽환적인 이야기를 펼치는 연극 '바늘과 아편'. /LG아트센터 제공
지난 17~19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연극 '바늘과 아편'은 '달의 저편'(2003) '안데르센 프로젝트'(2007)에 이은 캐나다 연출가 로베르 르파주의 세 번째 내한 공연이다.

사랑을 잃고 실의에 빠진 남자가 있다. "고뇌, 자신감 부족, 상처 입은 마음은 침술로도 고칠 수 없다"고 속삭이는 그는 파리의 한 호텔에 머물면서 중독된 사랑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최면 치료를 받으려 한다. 여기에 뉴욕에서 파리로 돌아오며 편지를 쓰던 프랑스 작가 장 콕토, 파리를 방문해 재즈 연주로 실존주의 지식인을 매혹시킨 미국 재즈 연주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이야기가 겹친다. 무대 위 허공에 뜬 거대한 큐브(입방체)가 끊임없이 회전하며, 연극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환상으로 변한다. 정육면체의 한 면이 호텔 창문이면, 다른 한 면은 빌딩 숲, 다른 곳은 하늘이다. 1940~50년대와 현재, 뉴욕 거리와 파리 재즈 클럽이 순식간에 교차하더니 별빛이 가득히 쏟아지고 배우는 공중으로 솟는다.

소품과 영상이 마술처럼 튀어나오며 연극과 영화의 경계마저 허물어진다. 화면에 등장하는 가수 줄리엣 그레코와 배우 잔 모로가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비친다. 공연이 끝난 뒤 콕토와 데이비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듯한 기분도 들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