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쓰기'의 힘… 미술로 살려내다

  • 김미리 기자

입력 : 2015.09.15 00:23

[현대미술가 안규철 개인展, '쓰기의 추억' 복원 프로젝트]

관객 한명이 1시간씩 필사한 '무진기행' 등 소설 원고 모아 책으로 만드는 '1000명의 책'
벽에 8600장 메모지 붙여 '그리운 것' 적게 하기도… "知性과 人文의 회복 필요"

당신은 하루에 손으로 몇 글자나 쓰는가. 컴퓨터나 스마트폰 키보드로 생산하는 '전자 글씨' 말고 오로지 손에 펜을 쥐고 쓰는 진짜 글씨를 어쩌면 한 자도 안 쓰는 이가 태반일 것이다. 우리는 '쓰기'와 손의 힘을 잃어가고 있다.

"'쓰기'는 모두가 공유하는 기억의 접점이자 우리 사회가 잃어가는 가치이지요. 미약하나마 '쓰기의 추억'을 복원하고 거대한 대중문화의 물결 속에서 맥 못 추는 문학을 조명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14일 국립현대미술관 제5전시관에서 개인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연 현대미술가 안규철(60·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이 설치 구조물 안에 놓인 책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책상 위엔 원고지가, 그 옆 책받침대엔 카프카의 소설 '성'이 펼쳐져 있다. 홈페이지로 예약한 관객이 한 명씩 책상에 앉아 1시간 동안 소설을 베껴 쓰고, 다음 관객이 다음 부분을 이어 쓴다. 전시 기간 5개월 동안 이상의 '날개', 김승옥의 '무진기행' 등을 관객이 필사(筆寫)한 원고로 책을 만들어 참가자들에게 나눠준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 '1000명의 책'이다. 예술의 영역 허물기 붐을 타고 미술이 건축, 음악, 패션 등으로 외연을 넓힌 적은 많았지만 미술과 출판의 결합은 새롭다.

메모지 8600장을 이어 만든 대형 작품 ‘기억의 벽’ 앞에 선 안규철. 관객들이 ‘그립지만 지금은 없는 한 개’를 적은 메모장을 붙였다. 작가가 쓰고 싶은 단어는 ‘아버지’라 했다.
메모지 8600장을 이어 만든 대형 작품 ‘기억의 벽’ 앞에 선 안규철. 관객들이 ‘그립지만 지금은 없는 한 개’를 적은 메모장을 붙였다. 작가가 쓰고 싶은 단어는 ‘아버지’라 했다. /고운호 객원기자
이번 전시는 현대자동차가 10년간 매년 9억원을 후원해 중견 작가를 지원하는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의 두 번째 프로젝트다. 국내에서 한 작가에게 가장 많은 지원금을 투입하는 프로젝트로 미술계 안팎에서 이목이 집중되는 대규모 전시다. 안규철은 지난해 이불에 이은 두 번째 선정 작가다. 그는 "프로젝트가 크다고 해서 거대한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며 "우리의 일상에서 없어지는 것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근본적으로 결여된 것을 드러내 이름을 불러 보는 전시"라고 했다.

작가는 서울대 조소과를 나와 미술 잡지에서 7년간 기자 생활을 했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에 유학했다. 1980년대 중반 기념비적인 대형 조각이 유행하던 시절 작은 미니어처 조각을 만들면서 그 흐름을 거슬렀다. 이후 익숙한 일상 사물로 부조리한 현실을 뒤트는 개념적 작품을 선보이며 독자적 길을 걸었다. 스스로 "조각계의 변절자이자 이단"이란 말을 서슴지 않는다.

책상을 둬 관객이 1시간 동안 소설책 일부를 필사하게 한 작품 ‘1000명의 책’ 사진
책상을 둬 관객이 1시간 동안 소설책 일부를 필사하게 한 작품 ‘1000명의 책’.

'1000명의 책' 옆 벽면엔 메모지 8600장을 이어 만든 폭 12.4m, 높이 3.5m 작품 '기억의 벽'도 설치됐다. 관객에게 종이를 주고 '그립지만 지금은 없는 한 개를 써라'고 지시한다. 카드로 벽이 다 채워지면 새 종이를 꽂는다. "시각화된 유토피아 여론조사"란다. 전시가 끝나면 이 단어들로 '사라진 것들의 책'을 만들 예정이다.

쓰기는 아버지의 유산 (遺産)이다.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 늘 공책에 의료 전문 서적을 필사했다. 어느 날 보니 아버지의 모습이 그에게로 와 있었다. 그의 하루 일과는 공책을 펼쳐 무언가를 적는 걸로 시작된다. "내게 '쓰기'와 '그리기'는 왼손과 오른손 같습니다. 세상을 균형 있게 보려는 과정이지요."

작가가 쓰기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지성(知性)과 인문(人文)의 회복이다. "우리 사회는 지적인 것을 경외(敬畏)하는 전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정치가도 기업가도 그걸 말하지 않으니 미술가라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봤습니다." 아버지 세대의 문화적 유산을 아들 세대로 물려주겠다는 베이비붐 세대 작가의 결연한 의지다. 내년 2월 1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