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숨어 살던 奧地, 연극만을 위한 '예술村' 되다

  • 도가·시즈오카(일본)=유석재 기자

입력 : 2015.09.03 01:02

[문화 혁신의 기원을 가다] [크리에이티브 로드]
[8] 아시아 연극의 '중심지' 日 도가·시즈오카 연극촌

도쿄서 250㎞ 떨어진 山村 도가, 전통 가옥 개조하고 호수 새로 파
극장 6개, 4만평 규모 연극村으로… 매년 열리는 연극제 수천명 몰려
전통·현대 양식 결합한 대극장 등 두 번째 연극촌, 시즈오카에 건설

유석재 기자 사진
유석재 기자

호수와 산으로 이어진 원형 야외극장 위로 연신 불꽃이 터졌다. 정교하게 연출된 불꽃은 공연 내용에 따라 화염처럼 솟구치거나 포성(砲聲)이 돼 덮쳤고, 폭포처럼 공중에서 흘러내리기도 했다.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 700명은 공연이 끝나자 앞다퉈 무대로 나가 배우들이 나눠주는 사케를 한 잔씩 마셨다. 세계 각지에서 이 극장을 찾은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이었다. 지난 22일 일본 도야마(富山)현 난토(南礪)시 도가(利賀)예술공원에서 열린 스즈키 컴퍼니 오브 도가(SCOT)의 여름 시즌 개막작 '세계의 끝에서 안녕'이었다.

"40년이 흘렀다. 총리가 스무 번 넘게 바뀌는 동안 이곳은 연극의 성지(聖地)가 됐다." 연극 연출가이자 이곳 '도가 연극촌'의 설립자인 스즈키 다다시(鈴木忠志·76)가 말했다.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약 250㎞ 떨어진 이곳은 도야마시에서도 차를 타고 두 시간 가까이 들어가야 하는 오지(奧地)다. 주민이 400명뿐인 이곳에 면적 12만4000㎡(약 3만7500평), 극장 6곳을 갖춘 연극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국제 연극제가 열리고, 일본 안팎에서 수천명의 관객이 오직 연극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상업 연극이 아니라 스즈키 연출작을 비롯한 세계의 예술성 높은 작품이 공연된다. 경남 밀양 등 한국의 연극촌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는 곳이다.

산골 마을에 심은 '거대 연극촌'의 꿈

"사람이 살지 않는 전통 가옥 한 채를 빌려주십시오." 눈보라가 몰아치는 1976년 2월 신진 연출가로 이름을 떨치던 스즈키 다다시는 도가 마을의 촌장 집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옛날 적에게 쫓긴 사무라이들이 숨어 살던 곳, 사방을 돌아봐도 삼나무 숲뿐이고 겨울이면 눈이 3~4m까지 쌓이며 가끔 곰이 먹이를 찾아 마을까지 내려오는 산촌에 그가 새로 만들겠다는 것은 '연극만을 위한 예술촌'이었다.


 

일본 도가 연극촌의 야외극장을 찾은 관객들이‘세계의 끝에서 안녕’을 관람하고 있다. 40년 전 산골 오지에 건립된 이 연극촌은 세계적 명소가 됐다. 아래 사진은 도가에서 공연된 스즈키 다다시 연출‘리어왕’
일본 도가 연극촌의 야외극장을 찾은 관객들이‘세계의 끝에서 안녕’을 관람하고 있다. 40년 전 산골 오지에 건립된 이 연극촌은 세계적 명소가 됐다. 아래 사진은 도가에서 공연된 스즈키 다다시 연출‘리어왕’. /SCOT 제공

"뭐야, 정신이 나갔나." "혹시 신흥 종교에 빠진 거 아냐?" 사람들이 수군댔다. 그것은 '연극이란 사람들이 찾아오기 쉬운 장소인 도시에서 해야 한다'는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대도시를 탈피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예술 활동을 해 보겠다는 것이 스즈키의 생각이었다. "모세도 그랬고 마오쩌둥(毛澤東)도 그랬다. 한 번 멀리 떠나 벗어나야 한다."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가 그를 도와 극장을 설계했다. 전통 가옥 내부를 극장으로 바꿔 도가산방(利賀山房)이란 소극장을 만들었다. 모모세(百瀨)천변에 커다란 호수를 파고 고대 그리스 양식에 일본 노(能)스타일을 가미한 원형 야외극장을 지었다. 이렇게 40년 동안 꾸준히 연극촌을 건설했다. 마을 체육관을 개조한 6번째 극장 도가대산방을 세운 것은 도가로 온 지 38년째인 2013년의 일이었다. 금방 성과를 내기 어려운 이 장구한 연극촌 건설 작업을 일본 국제교류기금과 도야마현 등 정부 기관이 묵묵히 지원해줬다.

"연극의 기본기를 배우자"

올여름 도가 연극촌은 국제도시를 방불케 할 만큼 세계 각국에서 온 연극인들의 모습이 줄곧 눈에 띄었다. 한국·중국·베트남·미국·독일·이탈리아 등 20여개국에서 온 30여명의 외국인이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스즈키 메소드(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연기법)'를 배운다.


 

스즈키 다다시가 세운 시즈오카 예술극장 사진
스즈키 다다시가 세운 시즈오카 예술극장. /SPAC 제공

그의 메소드는 무척 독특해 보인다. 몸의 중심을 하체에 두고 발성은 단전(丹田)에서부터 한다. 배우들은 발을 바닥에 붙인 채 힘줘 쿵쿵 걷고, 무척 굵직한 목소리를 낸다. 여자 배우에게서 남자 같은 음성이 나온다. 스즈키는 "배우의 호흡, 몸의 중심, 에너지 소비 세 가지를 적절히 조절하는 기술"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가부키(歌舞伎) 등 일본 전통극에 뿌리를 둔 이 방법은 배우들에겐 '지옥의 훈련'과도 같다. 2007년 처음 스즈키 메소드를 배운 한국 배우 이성원씨는 "30분을 연습하고 나면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힘들었지만, 배우가 모든 상황에서 가장 빠르고 힘 있게 연기를 할 수 있는 기본기를 갖춰주는 메소드"라고 말했다.

두 개의 '연극 타운'을 건설하다

스즈키는 1999년 두 번째 연극촌 건설의 실험에 나섰다. 시즈오카(靜岡)에서 열린 제2회 연극 올림픽 개최를 위해 시즈오카현 무대예술센터(SPAC)의 예술총감독을 맡았던 것이다. 이번엔 산촌이 아닌 대도시였다. '이것도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지만, 도가와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규모와 시설을 갖춘 극장을 건설했다. 시내 한복판에는 오페라도 열 수 있는 대극장인 시즈오카 예술극장을 지었고, 무대예술공원에 전통과 현대 양식을 결합한 다엔도(楕圓堂), 간결한 구조의 박스 시어터, 야외극장 우도(有度) 등 특색을 갖춘 극장 세 곳을 지었다.


스즈키에 이어 2007년부터 중견 연출가 미야기 사토시(宮城聰)가 예술총감독을 맡고 있는 SPAC은 매년 '후지노쿠니 세계연극제'를 열고, 도쿄·요코하마·시즈오카 등 대도시 관객을 상대로 공연을 하고 있다. 나루시마 요코(成島洋子) SPAC 예술국장은 "최첨단 연극보다는 연극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가로 돌아온 스즈키는 지난해 이곳에서 '도가 아시아 예술제'를 열기 시작했고, 2018년 세계 연극 올림픽 개최도 계획하고 있다. 자신이 건설한 산촌(도가)과 대도시(시즈오카)의 두 연극 타운 중에서 전자를 '국제 연극 예술의 중심지'로 만드는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