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는 2만, 한 달 관객은 20만… 객석 감싼 수백개 스피커, 호수 위 오페라를 펼치다

  • 브레겐츠=김기철 기자

입력 : 2015.08.27 00:47

[문화 혁신의 기원을 가다]
[크리에이티브 로드] [7] 첨단기술과 예술의 만남브레겐츠 페스티벌

1946년 세계대전 참화 딛고 콘스탄스 호수 무대로 시작, 007 영화 배경으로 유명해져
빈 대학연구소와 공동개발한 독자적인 야외 음향시스템에 빈 심포니 연주, 예술성 더해
제작 기간 1년·비용 95억원… 세트 제작에도 심혈 기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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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기자

콘스탄스(독일명 보덴) 호수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 9시. 오스트리아 서쪽 끝 호반 도시 브레겐츠에선 본격적으로 축제가 시작됐다. 호수 위 수상 무대에는 길이 72m, 최고 높이 27m짜리 '만리장성'이 펼쳐졌다. 무대 아래 물속부터 성벽 위까지 토용(土俑) 무사 205명이 가득하다. 지난달 22일 개막한 브레겐츠 페스티벌 간판 상품인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무대다.

호숫가 수상 무대에서 올리는 야외 오페라는 인구 2만의 소도시 브레겐츠가 여름 한 달 오페라 관객만 20만명 넘게 끌어들이는 원동력이다. 축제 기간에는 브레겐츠는 물론 도른비른, 독일 린다우 등 인근 도시 호텔까지 동날 만큼 관광객이 몰려든다. 브레겐츠에서 6㎞ 떨어진 작은 마을 로하우에 막차로 객실 하나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알프스 산맥 아래 호수를 무대로 삼은 브레겐츠 수상 오페라의 매력은 강렬하면서도 예술적인 시각 효과. 세트 건설 기간만 1년에 700만유로(약 95억원)를 들였다. 2m 높이 토용 무사들과 흙빛 만리장성은 붉고 푸른 조명 아래 당당한 위세를 뽐냈다. 작년 '마술피리' 여주인공 파미나처럼 투란도트 공주는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배를 타고 등장했다. 반대쪽에선 페르시아 왕자가 역시 배를 타고 무대 앞으로 나온다. 페르시아 왕자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하지만 실패한다. 병사들에게 붙잡혀간 페르시아 왕자가 10m 넘는 성벽에서 목이 매달려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은 섬뜩할 만큼 실감 났다.


 

알프스산맥을 배경 삼아 콘스탄스 호수 위 수상 무대에서 열리는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이 야외 오페라 1편을 보기 위해 인구 2만 소도시 브레겐츠에 20만명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알프스산맥을 배경 삼아 콘스탄스 호수 위 수상 무대에서 열리는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이 야외 오페라 1편을 보기 위해 인구 2만 소도시 브레겐츠에 20만명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김기철 기자
공연 중반부터 호수 안을 헤엄치던 오리 일가족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칼라프 왕자와 투란도트 공주의 이중창에 끼어들었다. 관객들은 느닷없는 '배우'의 출연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리 배우'는 불쑥불쑥 오페라에 끼어들었지만, 그때마다 관객들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브레겐츠 수상 무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브레겐츠 페스티벌엔 테너 김경호가 대신 '핑, 팡, 퐁' 삼총사 중 퐁으로 나서 반가움을 더했다. 김경호는 린츠 극장서 '마술피리' 주역 타미노 왕자로 출연한 경력을 인정받았다.

◇첨단 기술과 예술의 만남

브레겐츠는 성악가들이 핀 마이크를 뺨에 붙이고, 스피커를 대놓고 쓴다. 객석 삼면도 수백개가 넘는 스피커가 감싸고 있다. 야외 수상 무대를 안내하던 브레겐츠 페스티벌 직원 리사 클루는 "무대 위 만리장성에만 대형 스피커 59대가 설치돼 있다"고 했다. 엘리자베스 소보트카 브레겐츠 페스티벌 예술감독은 "스피커 없이 수상 오페라를 제대로 즐기긴 어렵다. 자연스러운 음향을 가장 잘 살린 곳"이라고 했다. 2000년 전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특별한 음향 장치 없이 공연하는 베로나 야외 오페라와는 다른 점이다.

진나라 토용을 모델로 삼은 중국 무사들. ‘투란도트’ 무대엔 모두 205명의 무사가 등장한다.(왼쪽 사진)‘투란도트’ 공연 직후 출연진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진나라 토용을 모델로 삼은 중국 무사들. ‘투란도트’ 무대엔 모두 205명의 무사가 등장한다.(왼쪽 사진)‘투란도트’ 공연 직후 출연진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브레겐츠 페스티벌 측은 2007년 오스트리아 빈의 대학 음향 연구소와 공동으로 '브레겐츠 야외 음향'이라는 독자 시스템을 개발했다. 객석에서 들어보니 고급 오디오를 갖춘 방 안에서 듣는 것처럼 성악가들의 노래와 움직임이 생생하게 들렸다. 작년에 올린 '마술피리' 때보다 소리가 더 자연스럽게 들렸다. 음향 기기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첨단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관극 효과를 최대화한 것이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예술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빈 심포니다. 빈 심포니는 호숫가 야외 무대가 아니라, 객석 뒤쪽과 맞닿은 1656석짜리 콘서트홀에서 연주한다. 오페라 공연 내내 무대 좌우에 설치한 대형 화면으로 이탈리아 지휘자 파올로 카리냐니(54)와 빈 심포니 단원들의 모습이 중계됐다. 야외 공연장과 100~200m 떨어진 실내에서 연주하지만 시차 없이 성악가들과 정확하게 호흡을 맞추는 게 신기할 정도다. 프라하 필하모닉 합창단과 브레겐츠 페스티벌 합창단도 콘서트홀 안에서 연주했다.

◇세계대전 참화 딛고 출범한 페스티벌

숫자로 본 브레겐츠 페스티벌 그래픽

브레겐츠가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가 맞대고 있는 콘스탄스 호숫가에서 야외 오페라를 시작한 것은 1946년이다. 세계대전의 참화를 딛고 호수 위에 배를 띄워 야외 오페라를 올린 게 히트를 쳤다. 눈 덮인 알프스 자락 푸른 호수는 그 자체가 환상적인 무대가 됐다. 1985년부터 오페라 1편씩, 2년간 여름 시즌에 올리는 것을 정례화했다.

푸치니 '토스카'는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이름을 세계 곳곳에 알린 계기가 됐다. 2008년 개봉한 007 영화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악당을 만나 대결을 펼친 곳이 바로 브레겐츠 페스티벌 '토스카' 무대였기 때문이다. 역대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은 작년까지 페스티벌 예술감독이던 데이비드 파운트니 영국 웰시 오페라 예술감독이 연출한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가 썼다. 2013년과 2014년 2년간 40만6000명이 '마술피리'를 봤다. 일반인과 애호가들을 모두 끌어들일 만큼, 예술적 수준을 유지한 게 성공 비결이다. 종전 기록은 2003년과 2004년 40만5314명이 본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였다.

올해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실내 페스티벌 극장에서 자크 오펜바흐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를 올리고 빈 심포니 콘서트를 여는 등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꾸몄다. 오페라 스튜디오와 워크숍을 통해 성악가들을 길러내고 창작 역량을 끌어올리는 기초 작업까지 소홀히 하지 않는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전통 예술 장르인 오페라가 첨단 기술과 만나 문화 상품으로 성공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