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스가 태어나고 자란 곳… 또 다른 '음악의 용광로' 되다

  • 리버풀·런던=권승준 기자

입력 : 2015.07.29 23:50

[문화 혁신의 기원을 가다] [크리에이티브 로드] [5]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런던

10대 소년 존·폴·조지·링고, 매튜 스트리트서 밴드 결성… 61년부터 캐번 클럽서 활동
애비로드 스튜디오와 협업해 이후 모든 앨범 이곳서 제작
현재도 '비틀스 精神' 잇는 인디 페스티벌 매년 열려

리버풀·런던=권승준 기자
리버풀·런던=권승준 기자
1957년 7월 6일 영국 리버풀에 살던 10대 소년 존과 폴이 처음으로 만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로큰롤 음악에 열광하던 두 소년은 존 레넌(1940~80)과 폴 매카트니(73)였다. 그로부터 3년 뒤 밴드 '비틀스'가 결성됐다. 같은 리버풀 출신 조지 해리슨(1943~2001)과 링고 스타(75)가 합류해 4인조로 진용을 갖췄다. 1962년 첫 싱글이자 최초의 히트곡 '러브 미 두(Love Me Do)'로 시작해 1970년 해체하기까지 8년 동안 비틀스는 세계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반짝이는 별이었고, 그 빛은 이후에도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비틀스엔 '위대한 밴드'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이 위대한 밴드의 발자취를 따라 리버풀과 런던을 찾았다.

◇리버풀 매튜 스트리트: 비틀스를 낳은 용광로

"비틀스가 나타났을 때 리버풀엔 엄청난 수의 밴드가 함께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비틀스는 그들과 교류하고 경쟁하면서 자신들의 음악을 발전시킬 수 있었죠."

리버풀의 음악 축제인 '사운드시티 페스티벌'의 데이비드 피칠링기(Pichilingi) 대표는 비틀스가 위대한 밴드가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비틀스가 결성되던 당시 리버풀은 하나의 거대한 음악적 용광로였다. 리버풀의 10대 소년들 사이에선 밴드를 결성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비틀스와 함께 400여개 팀의 아마추어 밴드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라이브 클럽이 밀집해 있는 리버풀 중심가 매튜 스트리트로 모였다. 지금 이 거리 초입에는 '비틀스의 탄생지'라는 말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비틀스는 이 거리에 있는 캐번 클럽(The Cavern Club)이란 라이브 클럽에서 1961년부터 공연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매튜 스트리트에선 매일 밤 재즈, 포크, 블루스 그리고 가장 인기있던 로큰롤 음악이 들렸다. 이 용광로가 비틀스를 낳고 단련시켰다. 비틀스는 캐번 클럽에서만 2년간 총 274회의 공연을 했다. 비틀스를 스타로 키워낸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처음 이들의 공연을 본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록 음악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인 비틀스의‘애비로드’앨범 커버(아래 오른쪽 사진). 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와 이 횡단보도에는 지금도 매일 비틀스의 팬들이 찾아와 담벼락에 메시지를 남기고(위 사진) 기념사진을 찍는다.
록 음악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인 비틀스의‘애비로드’앨범 커버(아래 오른쪽 사진). 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와 이 횡단보도에는 지금도 매일 비틀스의 팬들이 찾아와 담벼락에 메시지를 남기고(위 사진) 기념사진을 찍는다. /사진가 천호정씨 제공
지금도 캐번 클럽에선 매일 5~6개팀의 라이브 공연이 열린다. 대부분 비틀스부터 펄 잼, 너바나, 밥 딜런 같은 뮤지션들의 곡을 연주하는 밴드라서 관광지에 가까운 인상이다. 그렇다고 '록의 성지가 관광지가 돼버렸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때의 용광로 역할을 이제는 사운드시티 페스티벌이 하고 있다. 매년 5월 열리는 이 축제에선 영국뿐 아니라 캐나다· 이스라엘 그리고 한국까지 전 세계에서 온 무명 밴드들이 천막 하나 쳐 놓은 공연장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들려준다. 피칠링기 대표는 "비틀스처럼 이런 인디 밴드들이 음악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라고 말했다.

◇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영감(靈感)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비틀스가 처음부터 인정받은 건 아니었다. 수십 군데 음반사 문을 두드렸지만 냉대만 당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협박에 가까운 애원을 해서 메이저 음반사인 EMI 산하의 팔로폰과 겨우 계약을 맺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때부터 비틀스와 애비로드(Abbey Road) 스튜디오의 협업이 시작됐다. 1931년 문을 연 애비로드 스튜디오는 1960년대에 이미 최고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가진 스튜디오로 정평이 나 있었다. 비틀스가 이곳에서 앨범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애비로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튜디오가 됐다. 녹음실 4개 중 비틀스가 주로 녹음했던 2번 녹음실은 이제 '비틀스 녹음실'로 불린다.

애비로드 스튜디오의 마스터링(녹음 마무리 작업) 책임이사 루시 론더(Launder)는 "애비로드는 노련한 프로듀서와 엔지니어, 깊이 있는 사운드를 만들어주는 '챔버홀' 같은 기술력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비틀스 음악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음악적 영감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유능한 인재와 기술력이 영감을 현실로 바뀌줍니다." 이후 비틀스의 모든 앨범이 이 스튜디오를 거쳐 만들어졌다. 비틀스의 걸작 중 하나인 '애비 로드(Abbey Road)'는 이 스튜디오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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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비틀스가 공연했던 리버풀의 캐번 클럽(왼쪽)과 그 인근 거리에선 지금도 무명 뮤지션들이 공연하는 모습(가운데)을 볼 수 있다. 매년 리버풀에서 열리는 음악 축제‘사운드시티 페스티벌’도 미래의 스타를 꿈꾸는 밴드들이 무대에 오른다. /사진가 천호정씨 제공

애비로드 스튜디오가 가진 모든 노하우가 총결집된 앨범이 바로 1967년 나온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다. 이 앨범은 비틀스 최고의 명반으로 꼽힌다. 애비로드의 수석 마스터링 엔지니어 크리스티안 라이트(Wright)는 "꿈속을 걷는 듯한 사이키델릭 사운드부터 웅장한 오케스트라까지 당시로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사운드 실험을 담은 걸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비틀스:안주하지 마라

"비틀스의 음악적 경력을 보면 결코 안주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데뷔 때의 비틀스는 잘생긴 청년들이 멋진 옷을 입고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는 '보이 밴드'였죠.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갈구하고 도전하면서 위대한 밴드로 가는 길을 걸은 것입니다."

영국음악협회 톰 키엘(Kiehl) 이사의 말이다. 비틀스가 세계적인 밴드로 선 것은 1964년 '영국 음악의 미국 침공(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린 성공적인 미국 진출 이후부터다. 전 세계를 돌며 공연할 때마다 소녀팬들이 몰려들어 울부짖었다. 비틀스 멤버들은 영화도 찍고 책도 냈다. 그야말로 당대의 아이돌이었지만, 그들은 성공에 취하지 않았다.

히피문화, 극단적인 사운드 실험, LSD로 인한 환각 체험, 인도의 명상 문화 등 비틀스는 당대의 모든 새로운 요소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고 그것을 자신들의 음악에 녹여냈다. '예스터데이(Yesterday)' '올 유 니드 이즈 러브(All you need is love)'처럼 유려한 발라드가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다면, 강렬한 12현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어 하드 데이즈 나이트(A Hard Day`s Night)'와 하나의 코드로 진행되는 사이키델릭록 '투모로 네버 노즈(Tomorrow Never Knows)' 같은 곡은 다른 뮤지션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줬다. 겨우 20대였던 4명의 젊은이가 함께했던 단 10년의 시간이 그 이후 대중음악의 풍경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존 레넌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답을 내놓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여준 건 아주 작은 가능성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