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밭 한가운데 '노인과 바다'를 띄우다

  • 단양=유석재 기자

입력 : 2015.07.27 00:52

[폐관한 서울 대학로극장… 단양 농촌서 '만종리 대학로극장' 새로 열어]

24일 개막, 주민·연극인 300명 참석
"연극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 감탄
1000평 규모 친환경 연극촌 건설이 꿈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노인)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잖아요."(손자)

장대비가 퍼붓는 가운데 우비를 쓰고 끝까지 자리에 남아 있던 관객 100여명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15평(약 50㎡) 남짓한 허름한 야외 무대는 수박과 수수를 심은 밭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 24일 밤, 충북 단양군 영춘면 만종리 개울가에서 벌어진 '만종리 대학로극장'(대표 정재진·기주봉)의 개관 공연 '노인과 바다'(헤밍웨이 원작, 김진만 연출)였다.

"연극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 주민 허순호(55)씨가 말했다. 태어나서 연극을 처음 본다는 주민들은 연신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빈 도시락을 앞에 놓고 먹는 연기를 하거나, 거대한 물고기 소품이 공중으로 떠오를 때도 어김없이 박수가 이어졌다.

농촌 한복판에 연극 공연장이 들어선 것은 지난 4월 서울의 '대학로극장'이 폐관됐기 때문. 28년 역사의 대학로극장은 날로 상업화되는 대학로에서 치솟는 임차료를 감당하지 못했다〈본지 3월 16일자 A30면〉. 이들은 결국 서울을 떠나 귀촌(歸村)하기로 결심했다.

24일 밤 충북 단양군 영춘면 ‘만종리 대학로극장’의 ‘노인과 바다’ 공연 모습.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 극장의 개막 공연을 찾은 관객 100여명은 우비를 쓰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24일 밤 충북 단양군 영춘면 ‘만종리 대학로극장’의 ‘노인과 바다’ 공연 모습.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 극장의 개막 공연을 찾은 관객 100여명은 우비를 쓰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유석재 기자

지인을 통해 만종리 일대 농지를 임차하고, 단원 15명이 내려와 마을회관에서 숙식하며 주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대학로극장의 허성수 총감독은 "서울에선 공연이 끝나면 밤마다 술을 마시고 늦게 잠이 들었는데, 이곳에선 새벽 4시면 일어나게 된다. 삶 자체가 달라졌다"고 했다. 연극 연습을 하면서 농사일도 도왔다. 젊은 사람들이 많아지니 마을 어르신들도 좋아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연극 공연을 하겠다고? 단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소박한 야외 무대를 만들었다. 조명과 음향 장치도 달았다. "이곳 1년 임차료를 다 합쳐봐야 대학로 한 달 전기료 수준"이라고 할 만큼, 제작비는 많이 들지 않았다. 첫 무대로 이미 대학로에서 공연했던 '노인과 바다'를 올리기로 하고 분주히 준비했다.

개막일인 24일, 영춘면 주민을 비롯한 300여명이 농로를 가득 메우며 몰렸다. 공연 시작 전부터 연극인과 주민이 가설 천막 아래 한데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며 웃음꽃을 피웠다. 주민들은 개막식 참석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정동환·안석환·서이숙·한명구 등 유명 배우들을 보곤 앞다퉈 브이(V) 자를 그리며 휴대전화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극장 대표인 배우 정재진이 노인 역으로 무대 위에 오르자, 이미 그와 친숙해진 주민들은 한바탕 웃으며 환호를 보냈다. 무대 위와 아래의 구분이나 긴장감 같은 것은 없었다.

'만종리 대학로극장'은 앞으로 이곳에서 임차한 1000평 위에 연극촌을 세우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지역 농촌 체험과 어우러진 '친환경 연극촌' 건설의 꿈이다. 이날 무대 위의 정재진은 "난 먼바다에 있어도 희미한 등대 불빛을 보고 찾아갈 수 있어"라는 대사를 읊었다. 꼭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만종리 대학로극장의 '산촌에서 펼쳐지는 연극과 음악 예술 이야기'는 8월 9일까지 매일 밤 8~12시, (043)422-6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