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한 연산, 역사의 미궁 속에 빠지다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5.07.09 01:25

[연극 리뷰] 문제적 인간 연산

'문제적 인간 연산' 공연 사진
/국립극단 제공

셰익스피어극(劇)을 보는 듯했다. 처음부터 선왕의 혼령이 등장하는 것은 '햄릿' 같았고, "악몽이여, 이제 그만 멈추어라!"는 절규는 '맥베스'를 연상케 했다. 이미 한국 연극사에서 고전처럼 자리를 잡은 이윤택 작·연출의 '문제적 인간 연산'〈사진〉은 폭군으로 알려진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 작품이다.

1995년 초연, 2003년 재공연 이후 12년 만에 국립극단 제작으로 다시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의 완성도는 높았다. 이윤택 연극 특징인 제의적이고 연희적인 요소는 극 전체를 거대한 굿판으로 승화시켰고, 빠른 전개와 힘이 실린 대사는 몰입도를 더했다. 연산군 역의 백석광은 방대한 대사의 리듬을 종종 놓쳤으나, 유려한 연기를 통해 난폭과 유약의 이중성을 드러냈다.

제목에서 연산군을 '문제적 인간'이라고 한 것은 '과거를 극복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 인물'이란 뜻이다. "조선을 창세하신 단군왕검 할아버지가 무당이셨다. 신라 성골·진골도 무당이요, 글 배운 놈들은 고작 해야 그 밑구녕 육두품이 아니었더냐. …글 배우고 칼 찬 놈들이 설치면서 이 세상은 타락했다." 한국사를 유(儒)와 무(巫)의 투쟁처럼 단순화하는 연산군은 조선 왕조의 지도 이념인 유교사상과 그 옹호 세력인 사(士)를 타도 대상으로 겨냥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훈(內訓)'을 지어 유교 이념을 여성화한 인수대비는 거대한 팔다리를 지닌 괴물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이윤택이라기보다는 오태석 연극에 가까울 정도로 그로테스크했다. 사(士)의 부정은 곧 연산군이 저지른 사화(士禍)의 합리화로 이어진다. 그것은 "이 낡은 기둥이며 저 썩은 세상의 서까래를 부수는 일", 곧 '파괴를 통한 개혁'이다.

그러나 연산군의 정적 탄압에서 명분을 이루는 것은 "왜 공자 말을 따르느냐, 내가 중국놈이냐?"는 식의 거친 역사관이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 세대의 비극을 뼈저리게 겪은 주인공이 권력을 쥔 뒤 독단적인 개혁에 나선다는 극의 큰 틀은, 권력자의 개인적 일탈이 세상의 재앙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에는 눈을 감고 있다. 기이하게도, 160분에 이르는 이 연극에서 폭정의 진짜 피해자인 백성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2015년 다시 세상에 나온 이 1990년대산(産) 연극은 미궁(迷宮)에 빠진 듯하다. 역사가 휘발되고 예술이 유희가 된 자리에 남은 것은 스릴 넘치는 잔혹극이다.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