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쳤지, 환갑에 이걸 하다니"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5.06.22 01:26

[5년만에 무대 서는 윤석화의 모노드라마 '먼 그대']

연출가 임영웅 60주년 헌정무대… 각색·연출·출연까지 직접 소화
1시간 동안 수화·마임 넘나들며 사랑으로 고통받는 여인 연기

"나는 아무리 세찬 세상의 바람에도 가만히 견디어 낼 뿐입니다. … 그 수많은 억측과 편견과 천박함을 묻고, 나는 고요로 더욱더 깊숙이 나를 내립니다."

물기를 꾹꾹 누른 듯, 침착하면서도 유려한 목소리였다. '여왕'은 비극적인 무표정과 함께 귀환했다. 슬픔이 화석처럼 굳어진 듯한 그 표정은 원작 소설에서 '다지고 또 다져서 표면이 탄탄하게 굳어진 땅과 같다'고 묘사된 모습 같았다.

배우 윤석화(59)가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지난 18일 모노드라마 '먼 그대'가 개막한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엔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먼 그대'는 1983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서영은의 단편소설을 윤석화가 각색·연출·출연을 도맡아 무대에 올린 것. 임영웅의 연출 60주년을 기념하는 헌정 무대다.

모노드라마 ‘먼 그대’에서 열연하고 있는 배우 윤석화. 서영은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에서 윤석화는 각색·연출·출연을 도맡았다. 윤석화의 연극 출연은 5년 만의 일이다.
모노드라마 ‘먼 그대’에서 열연하고 있는 배우 윤석화. 서영은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에서 윤석화는 각색·연출·출연을 도맡았다. 윤석화의 연극 출연은 5년 만의 일이다. /산울림소극장 제공

윤석화의 연극 출연은 2010년 '베니스의 상인' 이후 5년, 모노드라마는 2006년 '영영이별 영이별' 이후 9년 만이다. 그 사이 풍파도 많이 겪었다. 2013년에는 명동예술극장에 올리려던 '딸에게 보내는 편지' 공연이 없던 일이 됐고, 지난해엔 제작하려던 라이선스 뮤지컬이 취소돼 그 자리에 자신이 연출한 안중근 의사 연극을 강행하기도 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그녀는 평범하고 수수한 모습이었다. 원작 분위기대로 낡은 니트와 코트를 입고, 나장균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와 함께 쉴 새 없는 독백 연기를 했다. 주인공 '문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고통스러운 구도(求道)의 길을 걷듯 살면서도 '낙타'로 상징되는 긍정적인 삶의 의지를 끝까지 잃지 않는다.

그걸 표현하기 위해 수화(手話)와 마임을 넘나든 윤석화의 몸짓은 우아했고, 독특하면서도 시적(詩的)인 발성엔 묘한 호소력이 깃들어 있었다. 때론 독백이 허공 한가운데 걸려 얼음처럼 부서지는 듯했다. 화사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묘사한 기쁨의 색조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고, '가을 편지'와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토해낸 슬픔의 종심(縱深)은 아득히 깊었다.

"그 빛에 도달하고 싶은 자유의 열렬한 갈망으로 온몸이 또다시 갈기갈기 펄럭입니다." 마지막 대사가 수화로 표현되며 한 시간 동안의 공연이 끝났다. 박수와 환호 소리가 천둥 같았다. 그녀의 내공은 녹슬지 않았고, 다만 약간의 세월이 쌓였을 뿐인 듯했다.

잠시 후 산울림소극장 1층 카페에서 선배 배우 손숙이 "모노드라마는 진짜 힘든데…. 연습 기간도 짧았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했어, 그래?"라며 혀를 내두르자, 연출가 임영웅이 "저 친구가 어디 보통 사람이야?"라고 했다. 윤석화가 "근데 나 정말 미쳤나 봐요, 환갑 나이에 이런 걸 하다니"라며 한숨을 내쉬자 배우 박정자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기운이 남아도네, 이런 소리 하는 걸 보니."


▷연극 '먼 그대' 7월 5일까지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02)334-5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