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앞섰네… 세상과 싸운 한 女人의 삶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5.05.13 00:36

1925년 쓰여 90년 만에 초연… 김우진作 연극 '이영녀'

김우진 극작가 사진
김우진
"오늘 또 공장 감독하고 싸우고 왔소. 으째 사람을 개돼지 모냥으로 부리는지 몇며시 공론을 하고 대꾸를 해줬당께. …주먹이 무설 것이 뭣 있다요. 옳고 그른 것을 몰라주는 하느님이 야속하제."('이영녀'의 주인공 영녀의 대사)

무대 위에 쌓인 오래된 장롱들이 음침한 분위기를 더했다. 이서림, 남미정, 김정은 등 배우들의 연기는 1920년대 빈민들의 암울한 삶에 극적인 힘을 실었다. 지난 11일 서울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있었던 연극 '이영녀(李永女·김우진 작, 박정희 연출)'의 첫 공연은 한국 연극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1925년에 쓰인 이 작품이 90년 만에 초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영녀'는 근대 극작가 김우진(金祐鎭·1897~1926)의 유작(遺作)으로, 국문학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자연주의 희곡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탈고 1년 뒤인 1926년 김우진이 성악가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투신자살한 이후 원고 상태로 남아 있다가 1975년 '연극평론'에 소개됐고, 1983년 '김우진 전집'에 수록됐다. 지난해 오영진 작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로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를 시작한 국립극단에 의해 무대 위에 오르게 됐다.

극작 90년 만에 초연된 연극 ‘이영녀’의 이서림(이영녀 역·오른쪽)과 심완준(인력거꾼 차기일 역).
극작 90년 만에 초연된 연극 ‘이영녀’의 이서림(이영녀 역·오른쪽)과 심완준(인력거꾼 차기일 역). /국립극단 제공

세 아이를 둔 평범한 여성 이영녀는 남편이 가출한 뒤 생계를 잇기 위해 매춘부로 나선다. 밀매춘 혐의로 감옥에 갔다 온 뒤 공장에서 일하다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하고 싸우는데, 새로 동거하던 남자는 폭력을 휘두른다. 영양실조까지 겹쳐 급격히 쇠약해진 영녀는 자리에 앓아눕게 된다.

얼핏 '비련의 여인'을 소재로 한 듯한 작품은 놀랍도록 힘이 넘친다. 주인공은 매춘을 하면서도 아이들을 교육시키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성(性)의 권리와 인권에 대한 주장을 하고 나선다는 점에서 여성해방의 단초도 눈에 띈다.

원작 희곡은 지문에서 이영녀의 죽음에 대해 "흰 얼굴빛 위에는 사면 같으나 생의 리듬이 돈다. …홀지에 먼 나라의 꿈 안 동작 모양으로 힘없이, 소리 없이, 극히 자연스럽게 왼편으로 넘어진다. 아주 정밀한 수분간"이라고 묘사했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이토록 아름답게 주인공의 죽음을 그린 한국 희곡은 거의 없었다"며 "미완성이 아니냐는 의문도 있지만 내용 면에선 완결된 작품"이라고 말했다.

▷연극 '이영녀' 31일
까지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공연 시간 85분, 1688-5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