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4.27 10:05
모더니티 돋보이는 연극 '리어왕'으로 다시 주목
건축가 김수근은 말했다.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건축처럼 공학·예술·인문을 아우르는 무대미술도 마찬가지다. '조명과 나무·철이 짓는 시'라 할 만하다.
연극 '리어왕'(연출 윤광진)은 그 시의 미학을 보여준다. 영국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심오한 작품이다.
무대미술가 이태섭(61)은 무대를 텅 비웠다. 리어왕을 비롯한 인물들의 비극이 그 공간을 대신 채운다. 네 줄에 매달린 무대 일부분이 공중에 떠올라 크게 흔들렸을 때가 정점이다. 폭우와 거센 바람에 나무까지 뿌리째 뽑히는 순간, 리어왕의 광기는 그 위에서 야생과 하나가 된다.
최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이태섭은 "스태프들과 함께 모은 '리어왕' 관련 자료 중 '흔들리는 대지'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부분이 휴먼네이처(Human Nature·인간본성)와 연관되더라"고 말했다.
"인간이 특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거지. 노망도 들고, 판단도 흐려지고. 불안한 인간 자체를 표현하고 싶었다. 특히 '리어왕'은 질서가 붕괴되는 이야기다. 권위가 깨지고 정치도 약해지고. 그런 부분을 은유하고 싶었는데, 이를 집대성한 것이 대지가 흔들리는 거지. 버나드 쇼가 "'리어왕'보다 훌륭한 비극은 없다"고 말했는데, 왕이 저 밑바닥까지 떨어지니 말을 다했지."
무대 위에 실제 물을 쏟아내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정형화된 '연극적'이라는 개념은 깨져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영상도 들어가야 한다. 요즘 관객들은 함께 체험하길 원한다."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듯 폭이 약 8m의 경사진 메인 무대(공중으로 치솟는 무대이기도 하다)가 있고, 그 주변을 상하 이동이 가능한 곁가지 무대가 따른다. 인물들의 유랑을 상징하는 곁가지 무대는 위태로워 보인다.
"메인 무대뿐만 아니라 옆 무대, 극장 구조가 다 보여지길 원했다. 공간 자체는 배우들의 연기를 위해서 존재한다. 위험한 상황을 평평한 무대 위에서 연기하면 그 만큼 실감이 안 날거라 생각했다." 공중에서 주체 없이 흔들리는 나무 한그루는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속 앙상하고 황량한 나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리어왕의 심리를 대변하거나 극의 해설자 역을 하는 광대의 마임이 생생함을 더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이런 장치들이 작품의 '현대성'을 부각시킨다. 이태섭이 최근 작업한 국립창극단 창극 '코카서스의 백묵원'(연출 정의신) 역시 고전인 브레히트의 작품을 바탕으로 했으나, 바로 지금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실제 객석은 비우고,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 위 3면에 관객들을 앉게 한 무대가 그런 효과에 기여했다. "이미 고전은 다 아는 이야기다. 똑같이 들려주면 재미가 없다. 얼마만큼 현대적으로 재현하는지가 관건"이라고 짚었다.
평소부터 공연제작 단체에 '자기 극장'이 없다는 걸 아쉬워한 이태섭(그는 극장 건축 전문가이기도 하다)은 명동예술극장(지금은 국립극단으로 편입)처럼 자기 극장이 있어야 무대미술을 포함한 공연 자체의 질이 높아진다고 강조했다.
"'자기 집'이 있어야 한다. 즉 극장마다 레퍼토리가 있어야 하지. 그러면 설계단계부터 작품에 맞게 무대를 최적화할 수 있다. 자기 집이 없으면 무대 제작기간을 포함해 그럴 여유가 없지. 시간이 있어야 시행착오도 거치면서 더 나은 무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영국 '내셔널 시어터'(국립극장)의 '워 호스' 속 말(나무로 만든 소품이라 실제 말 이상으로 감동을 준다)은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연극 무대 뿐 아니라 발레·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무대를 만드는 이태섭은 올해 프로 데뷔 25주년을 맞았다. 홍익대 대학원과 뉴욕시립대 브룩클린컬리지대학원에서 무대디자인을 전공한 뒤 귀국해 1990년 '오이디푸스 렉스'로 본격적인 무대미술을 시작했다. 2005년 '고양이늪'(연출 한태숙)으로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을 거머쥐는 등 수차례 상을 휩쓸며 대표적인 무대미술가로 자리매김했다. 강동아트센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리모델링이 그의 손을 거쳤다.
"무대미술가는 매번 새로 시작해야 한다. 애써 만든 것을 공연이 끝나면 다 부숴야 하니까. 미련 없이 부숴버리고 다 잊는다.(웃음) 연출 스타일, 장르 스타일따라 맞춰야 하니 다른 장르의 미술작가처럼 제 고유의 스타일만 내세우기도 힘들다. 그런데 매번 그 만큼 새로 도전하니까 즐겁다."
부끄러워서 작품집 낼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그는 "앞으로 할일이 더 많다"고 눈을 빛냈다. "예전보다 연극 작업하기가 좋아졌다. 물론 아직 갈길이 멀지만 이 만큼이나마 무대미술이 지원을 받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 5~6년 정도 됐나. 이병복 선생님 등 1세대 무대미술가분들이 고생을 하셔서 우리나라 무대미술의 틀을 만드셨다면 우리 같은 2세대는 기술적인 부분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실제 이태섭은 무대의 기술·공학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다. 올해 명예 퇴임하기 직전까지 몸담은 용인대 연극영화학과 내에 국내에서는 드물게 무대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리어왕'에서 공중으로 치솟는 철제 무대 역시 배우가 올라갔을 때의 무게까지 합쳐 와이어의 장력 등을 계산, 세밀하게 설계했다.
"무대디자인이 단순히 연극의 배경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은 과거 개념이다. 극적인 상황을 스태프들과 함께 만드는 거다. 연극적인 상황을 현실화화는 사람이지. 무대 공간이 나오지 않으면 연출 자체를 시작할 수 없다." 하지만 연극은 협업작품이라는 점을 더 강조했다. "자신만의 아이디어가 아닌 우리들의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24일 오후 이태섭이 밟은 '리어왕' 무대는 잠잠했다. 그와 무대는 하나였다.
'리어왕' 5월1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장두이, 이동준, 서주희, 이명숙, 서은경, 이기돈. 윤색 고연옥, 조명디자인 김창기, 의상디자인 김상희. 2만~5만원. 국립극단. 1644-2003
건축가 김수근은 말했다.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건축처럼 공학·예술·인문을 아우르는 무대미술도 마찬가지다. '조명과 나무·철이 짓는 시'라 할 만하다.
연극 '리어왕'(연출 윤광진)은 그 시의 미학을 보여준다. 영국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심오한 작품이다.
무대미술가 이태섭(61)은 무대를 텅 비웠다. 리어왕을 비롯한 인물들의 비극이 그 공간을 대신 채운다. 네 줄에 매달린 무대 일부분이 공중에 떠올라 크게 흔들렸을 때가 정점이다. 폭우와 거센 바람에 나무까지 뿌리째 뽑히는 순간, 리어왕의 광기는 그 위에서 야생과 하나가 된다.
최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이태섭은 "스태프들과 함께 모은 '리어왕' 관련 자료 중 '흔들리는 대지'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부분이 휴먼네이처(Human Nature·인간본성)와 연관되더라"고 말했다.
"인간이 특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거지. 노망도 들고, 판단도 흐려지고. 불안한 인간 자체를 표현하고 싶었다. 특히 '리어왕'은 질서가 붕괴되는 이야기다. 권위가 깨지고 정치도 약해지고. 그런 부분을 은유하고 싶었는데, 이를 집대성한 것이 대지가 흔들리는 거지. 버나드 쇼가 "'리어왕'보다 훌륭한 비극은 없다"고 말했는데, 왕이 저 밑바닥까지 떨어지니 말을 다했지."
무대 위에 실제 물을 쏟아내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정형화된 '연극적'이라는 개념은 깨져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영상도 들어가야 한다. 요즘 관객들은 함께 체험하길 원한다."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듯 폭이 약 8m의 경사진 메인 무대(공중으로 치솟는 무대이기도 하다)가 있고, 그 주변을 상하 이동이 가능한 곁가지 무대가 따른다. 인물들의 유랑을 상징하는 곁가지 무대는 위태로워 보인다.
"메인 무대뿐만 아니라 옆 무대, 극장 구조가 다 보여지길 원했다. 공간 자체는 배우들의 연기를 위해서 존재한다. 위험한 상황을 평평한 무대 위에서 연기하면 그 만큼 실감이 안 날거라 생각했다." 공중에서 주체 없이 흔들리는 나무 한그루는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속 앙상하고 황량한 나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리어왕의 심리를 대변하거나 극의 해설자 역을 하는 광대의 마임이 생생함을 더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이런 장치들이 작품의 '현대성'을 부각시킨다. 이태섭이 최근 작업한 국립창극단 창극 '코카서스의 백묵원'(연출 정의신) 역시 고전인 브레히트의 작품을 바탕으로 했으나, 바로 지금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실제 객석은 비우고,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 위 3면에 관객들을 앉게 한 무대가 그런 효과에 기여했다. "이미 고전은 다 아는 이야기다. 똑같이 들려주면 재미가 없다. 얼마만큼 현대적으로 재현하는지가 관건"이라고 짚었다.
평소부터 공연제작 단체에 '자기 극장'이 없다는 걸 아쉬워한 이태섭(그는 극장 건축 전문가이기도 하다)은 명동예술극장(지금은 국립극단으로 편입)처럼 자기 극장이 있어야 무대미술을 포함한 공연 자체의 질이 높아진다고 강조했다.
"'자기 집'이 있어야 한다. 즉 극장마다 레퍼토리가 있어야 하지. 그러면 설계단계부터 작품에 맞게 무대를 최적화할 수 있다. 자기 집이 없으면 무대 제작기간을 포함해 그럴 여유가 없지. 시간이 있어야 시행착오도 거치면서 더 나은 무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영국 '내셔널 시어터'(국립극장)의 '워 호스' 속 말(나무로 만든 소품이라 실제 말 이상으로 감동을 준다)은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연극 무대 뿐 아니라 발레·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무대를 만드는 이태섭은 올해 프로 데뷔 25주년을 맞았다. 홍익대 대학원과 뉴욕시립대 브룩클린컬리지대학원에서 무대디자인을 전공한 뒤 귀국해 1990년 '오이디푸스 렉스'로 본격적인 무대미술을 시작했다. 2005년 '고양이늪'(연출 한태숙)으로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을 거머쥐는 등 수차례 상을 휩쓸며 대표적인 무대미술가로 자리매김했다. 강동아트센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리모델링이 그의 손을 거쳤다.
"무대미술가는 매번 새로 시작해야 한다. 애써 만든 것을 공연이 끝나면 다 부숴야 하니까. 미련 없이 부숴버리고 다 잊는다.(웃음) 연출 스타일, 장르 스타일따라 맞춰야 하니 다른 장르의 미술작가처럼 제 고유의 스타일만 내세우기도 힘들다. 그런데 매번 그 만큼 새로 도전하니까 즐겁다."
부끄러워서 작품집 낼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그는 "앞으로 할일이 더 많다"고 눈을 빛냈다. "예전보다 연극 작업하기가 좋아졌다. 물론 아직 갈길이 멀지만 이 만큼이나마 무대미술이 지원을 받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 5~6년 정도 됐나. 이병복 선생님 등 1세대 무대미술가분들이 고생을 하셔서 우리나라 무대미술의 틀을 만드셨다면 우리 같은 2세대는 기술적인 부분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실제 이태섭은 무대의 기술·공학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다. 올해 명예 퇴임하기 직전까지 몸담은 용인대 연극영화학과 내에 국내에서는 드물게 무대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리어왕'에서 공중으로 치솟는 철제 무대 역시 배우가 올라갔을 때의 무게까지 합쳐 와이어의 장력 등을 계산, 세밀하게 설계했다.
"무대디자인이 단순히 연극의 배경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은 과거 개념이다. 극적인 상황을 스태프들과 함께 만드는 거다. 연극적인 상황을 현실화화는 사람이지. 무대 공간이 나오지 않으면 연출 자체를 시작할 수 없다." 하지만 연극은 협업작품이라는 점을 더 강조했다. "자신만의 아이디어가 아닌 우리들의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24일 오후 이태섭이 밟은 '리어왕' 무대는 잠잠했다. 그와 무대는 하나였다.
'리어왕' 5월1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장두이, 이동준, 서주희, 이명숙, 서은경, 이기돈. 윤색 고연옥, 조명디자인 김창기, 의상디자인 김상희. 2만~5만원. 국립극단.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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