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4.23 02:03
국립극단 셰익스피어극 '리어왕'
빗물 쏟아지고 나무 뽑히는 무대… 원작 충실하면서 현대적인 연출
2t 분량의 빗물이 배우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줄 네 개에 매달린 무대 바닥은 허공으로 치솟고, 나무마저 뿌리째 뽑혀 버렸다. 이 처절한 상황 속에서 관객의 가슴으로 비수처럼 내리꽂힌 것은 리어왕 역을 맡은 장두이의 대사였다. 믿었던 두 딸에게 배신당해 황야로 내쫓긴 뒤 백발을 쥐어뜯으며 사나운 비바람과 싸우는 이 장면은 광기와 분노가 극한에 달한, 셰익스피어극(劇) 전체의 절정과도 같았다. 지난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국립극단 작품 '리어왕'(연출 윤광진)의 한 장면이다.
◇현대적인 연출과 무대
지난해 탄생 450주년, 내년 서거 400주년인 셰익스피어의 최근 국내 공연작 중에서도 '리어왕'은 돋보이는 작품이다. 우선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서도 최고봉이라 할 만큼,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건드린 원작의 힘이 컸다. 가족과 세대 문제, 빈부 격차, 노인 문제, 법과 제도의 무용(無用) 같은 인간사의 원초적 문제들이 집약돼 있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은 기름기를 뺀 듯 무척 간결하고 현대적인 분위기로 연출됐다. 번역과 연출을 맡은 윤광진은 그 비결을 '셰익스피어 원전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셰익스피어 원어 자체가 대단히 현대적이고 단순 명확하다는 것이다. 배신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주인공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인간은 불쌍한 두 발 달린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벗자, 벗어, 이 단추를 풀어라"라고 내뱉는다. "아이들이 파리를 잡고 장난하듯, 신들은 우리를 데리고 장난을 치고 있는 거다"라는 대사 역시 가슴을 울린다.
무대미술가 이태섭은 숱한 장소가 등장하는 연극의 무대를, 장식을 거의 없앤 간결한 세트로 꾸몄다. 폭 8m의 사각형 판은 배우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대지가 됐다가 경사면을 이루면서 인간의 불완전한 본성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비극적인 광대, 장두이
아무리 훌륭한 무대와 연출이라 해도, 배우들의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면 3시간 가까운 공연을 몰입해서 보기란 어렵다. 이번 '리어왕'은 주인공을 맡은 장두이의 연기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독선과 아집으로 스스로를 파멸시켜 가는 리어왕의 캐릭터를 소름 끼치게 연기했다. 주인공이 얼굴에 하얗게 분을 칠한 채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세상에 태어나면서 소리쳐 우는 건, 바보들만 사는 이 거대한 무대에 태어나는 걸 알기 때문"이라는 대사를 할 때면, 관객은 궁극의 비극과 희극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광대 역의 이기돈, 글로서터 백작 역의 조영진도 뛰어난 연기를 보였다.
▷5월 1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