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세평(三視世評)] 18人의 알몸이 물었다 "이래도 야해?"

  • 김윤덕 기자
  • 유석재 기자
  • 권승준 기자

입력 : 2015.04.13 03:00 | 수정 : 2015.04.13 08:08

본능에 요동치는 무용수의 춤… 음란하기보단 낯선 감동으로

삼시세평 현대무용 '트라제디-비극'
벗는다고 다 야한 것은 아니었다. 옷을 벗고 예술을 입었다. 지난 10~11일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된 '19금(禁)' 현대무용 '트라제디-비극'은 신선한 도발이자, 낯선 감동이었다.

시작부터 다 벗고 나올 줄은 몰랐다. 어슴푸레하던 조명이 새하얗게 밝아지고 남녀 무용수 18명의 전라(全裸)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땐 두 눈을 의심했다. 몸에 달라붙는 특수 무용복을 입은 줄 알았다. '시꺼멓'거나 '덜렁거리'는 그 무엇이 보이기 전까진. 러닝타임 90분 동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무대를 활보하는 무용수들을 객석은 숨 죽인 채 응시했다.

첫 당혹감은 3분을 넘기지 않았다. 각지고 당당한 걸음걸이, 일절 수치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은 찾아볼 수 없는 무용수들의 '표정 없음'에 객석은 압도당했다. 엉큼한 마음을 품고 온 관객들에게 "이래도 선정적이야?" 하며 비웃는 듯했다. 늘어진 뱃살, 처진 엉덩이, 말라깽이 다리 등 결코 아름답다거나 선정적이라고 할 수 없는 몸들의 행진은 "육체를 보면 세상의 수수께끼가 풀린다"는 안무가 올리비에 뒤부아의 철학을 웅변했다.

도입부가 너무 늘어진 게 문제였다. 40분 가까이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무대 뒤에서 걸어 나왔다가 무대 앞에 이르면 '뒤로~ 돌앗!' 구령에 맞춘 듯 돌아서 들어가는 '제식훈련식 안무'를 반복했다. '저게 무슨 의미일까?' 고심하며 답을 찾으려던 관객은 지친 나머지 하품하며 몸을 비틀었다. 아무리 고혹적인 나체(裸體)라도 너무 오래 보면 지겨운 법이다.

'설마, 이대로 걷기만 하다 끝나는 걸까?'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 때쯤, 변화가 일어났다. 올곧게 걷던 그들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쥐어뜯는 남자도 있고, 미친 사람처럼 웃는 여자, 괴로운 듯 무대를 구르는 사람들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족속이 방탕과 혼돈의 시간으로 들어선 것일까. 시종일관 한 대의 타악기로 둥둥거리던 배경음악에 잡음이 섞여 들었다. 공연사고인 줄 착각할 만큼 머리가 깨질 듯한 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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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명의 남녀무용수가 벌거벗고 나오는 현대무용‘트라제디-비극’. 90분 공연 내내 누드로 펼쳐지는 공연인데도 음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성남아트센터 제공
무용수들 몸짓이 에로틱해지고 격렬해지면서 객석에 조용한 동요가 일어났다. 이 공연이 19금이 된 가장 큰 이유, 성애(性愛) 장면이 등장할 시간이 된 것이다. 남녀 두 명씩 9쌍이 짝을 이뤄 상체와 하체를 난폭하게 요동치며 보여준 하이라이트는 음란하다기보다는 장엄했다. 본능, 그로 인한 원초적인 고통과 법열(法悅)의 감정이 교차했다. 모든 비극, 결국 사랑에서 시작되지 않던가. 대형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듯, 조명을 활용해 무용수들의 몸부림을 스틸컷으로 연출한 장면은 압권이었다. 몽둥이를 휘두르는 듯한 일렉트릭 기타 소리는 정확히 심장 박동수와 일치했다. 사르트르가 말했던가. '타인은 나의 지옥'이라고.

작품 제목 '비극'은 독일철학자 니체의 문제작 '비극의 탄생'에서 따 왔다. 니체와 나체가 만난 셈이다. 안무가 뒤부아는 '황량한 대지에 벌거벗은 채 내팽개쳐진 자아가 타인과 어울려 진짜 사람이 된다'는 실존적 주제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그걸 온전히 이해한 관객은 많지 않은 듯하다. 공연이 끝났지만 박수는 7, 8초가 지나서야 터져나왔다. 민망했다. 다만 모든 무용수들이 퇴장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 여인, 빨강머리에 풍만한 가슴, 출렁이는 뱃살을 지닌 그녀의 웃는 듯 웃지 않는 시선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대지(大地)의 여신'이 있었다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공연 담당 기자(유석재)의 포인트!: 유튜브에 들어가 'tragedie'와 'dubois'로 검색하면 3분가량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볼 수 있다. 실제 공연보다 더 야한 느낌이 들게 한 건 마케팅 전략? 성인 인증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