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세종로의 중심에서 '광우병 괴담'을 비판하다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5.04.02 03:00 | 수정 : 2015.04.02 16:23

[이강백作·김광보 연출 '여우인간']

"그 여우들 말이 사실이라면… 쇠고기 먹은 美國人, 다 죽었어"
직설적 대사 통해 허구성 폭로 "與·野 모두 비판하려는 의도"

"그들은 순진한 사람들에게 미국 쇠고기를 먹으면 죽는다고 말하죠. 삶아 먹어도 죽고, 구워 먹어도 죽고, 튀겨 먹어도 죽는다고요. 그 여우들 말이 사실이라면, 미국 쇠고기를 먹은 미국 사람들은 벌써 다 죽었을 겁니다."(연극 '여우인간'의 대사)

2008년 정국을 뒤흔든 '광우병 사태'를 정면으로 비판한 연극이 나왔다. 시위의 주 무대였던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서 지난 주말 개막한 이 연극은 국내 대표적 극작가 중 한 사람인 이강백(68)의 신작 희곡을 바탕으로 서울시극단이 제작한 '여우인간'(연출 김광보)이다. 오는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 중이다.

광우병, 세월호 등을 소재로 ‘아무도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 연극 ‘여우인간’ 공연 사진
광우병, 세월호 등을 소재로 ‘아무도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 연극 ‘여우인간’. /세종문화회관 제공
1970년대부터 은유적인 기법으로 권력과 인간을 비판해 온 이강백은 이번 작품에서 작심한 듯 현실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은유와 풍자를 넘어서 직설(直說)에 가까운 대사들에 일부 평론가는 "연극이 할 수 있는 수준의 말을 넘어선 것 같아 당혹스럽다"고 말할 정도다. 작가는 '아무도 더 이상 미래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암울한 현실'을 '여우에게 홀린 사회'에 비유하고, 인간의 모습을 갖춘 여우들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 사회를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억울하게 몰린다는 내용의 극을 썼다. 시간적 배경은 2008년에서 2014년까지다.

극에서 시위대의 일원이 된 여우는 "미국 쇠고기는 위생적인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정치적인 문제는 확실히 있어"라고 말한 뒤 정부 쪽에 가담한 여우로부터 "넌 진보깡통이구나"라는 말을 듣는다. 극중 광우병 시위를 주도하는 '사회변혁운동연합' 사람들은 미국 소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이용하려 한다. "동지들, 바로 이때 선거를 한다면 반드시 우리가 이길 것이오! 그때까지 매일매일 촛불 집회가 계속됐으면 좋겠는데…"라는 속내를 드러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빗댄 '부엉이가 바위에서 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나자, 이들은 "기뻐하시오! 세상 민심이 완전히 우리 편으로 돌아섰소"라며 환호성을 지른다. 하지만 막상 총선에서 패하자 "우리는 여우한테 홀려서 안일했고 무기력했고 아무 전략도 없었소"라고 자책한 뒤 인터넷과 SNS를 통해 젊은 세대를 공략하는 '일파만파 전략'을 쓰지만 대선에서 또 패한다.

이강백은 "원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과거에서 현재로 왔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상황에 빗대 양쪽(여권과 야권)을 모두 비판하는 것이었는데, 극본과 연출 모두 광우병 이야기에 많이 기울어지게 됐다"고 전화 통화에서 말했다. 원작 희곡에는 뒷부분의 세월호 참사 비중이 크다. 그러나 실제 연극에선 '움직이지 말고 모두 제자리에 있으라'는 등의 대사가 빠졌고, 배우들이 부르는 '세월의 노래'가 차분하게 처리됐다. 연출가 김광보는 "작가 의도대로 그 장면을 선동적으로 연출했다면 연극이 자칫 프로파간다(정치 선전)가 될 우려가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