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 '천재 백남준'… 지금의 날 있게 한 영웅"

  • 허윤희 기자

입력 : 2015.03.06 00:14

[新作 들고 한국 찾은 비디오아트 巨匠 빌 비올라]

'물의 순교자' 등 영상作 7점서 고통 견디는 인간 모습 선보여
"신념 지켜내는 의지·희생 표현" 국제갤러리, 5월 3일까지 전시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
/국제갤러리 제공
밧줄에 발목이 묶인 남자가 웅크린 채 누워있다. 배경은 어두운 수직 스크린. 서서히 밧줄이 당겨지면서 거꾸로 매달린 그의 몸 위로, 거친 물줄기가 쏟아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의 몸이 하늘로 올라가며 화면에서 사라져간다. 암전. 작품명 '물의 순교자(Water Martyr)'.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64·사진)가 신작을 들고 한국에 왔다. 5일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에서 최근 2년간 작업한 영상작품 7점을 선보인다. 2003년과 2008년에 이어 세 번째 전시다. 개막 하루 전인 4일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비올라는 영상처럼 느린 속도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부처도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고통은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고통의 순간에 최고의 미덕을 보여줍니다."

7분 10초 분량의 '물의 순교자'는 지난해 5월 영국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에서 선보인 대규모 영상 '순교자' 시리즈 중 하나. 물, 불, 공기, 흙 등 우주의 4대 원소를 활용했다. 4개의 수직 스크린은 흙더미에 깔리고, 바람에 흔들리며, 불길에 휩싸이고, 물을 뒤집어쓰는 인간의 몸들을 비춘다. 그는 "순교자의 그리스 어원은 '증인'을 뜻한다. 오늘날 매스미디어는 현대인을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는 증인으로 만들고 있다"며 "자신의 가치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통과 고난, 심지어 죽음까지 짊어질 수 있는 인간의 희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비올라의 영상에서 물은 변화를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세로 5m 넘는 대형 영상물 '도치된 탄생(Inverted Birth)'은 흑색·붉은색·우윳빛 물을 번갈아 뒤집어쓰면서 변화하는 남자의 모습을, 시간대를 거꾸로 돌린 화면으로 보여준다. "여섯 살 때 호수에 빠져 익사할 뻔했어요. 그 때 호수 밑바닥에서 올려다본 푸른빛을 잊지 못합니다. 삼촌이 뛰어들어서 구하려 했는데 나는 아름다운 세상에 머물고 싶어서 삼촌을 계속 밀어냈어요. 지금도 그 순간을 늘 생각합니다."

평론가들은 그를 "생존 작가 중 가장 중요한 비디오 아트 작가"라고 입을 모은다. 비올라는 비디오 기술이 막 태동하던 1970년대부터 비디오란 매체를 다루기 시작했다. 1995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미국 작가로 나갔다.

2014년작‘물의 순교자’. 거꾸로 매달려 쏟아지는 물을 뒤집어쓰는 남자의 몸을 비춘다.
2014년작‘물의 순교자’. 거꾸로 매달려 쏟아지는 물을 뒤집어쓰는 남자의 몸을 비춘다. 7분 10초 영상. /국제갤러리 제공
인간의 탄생과 소멸,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영상은 한층 더 깊어졌다. 화면은 정적(靜的)이고 시적이다. 캘리포니아 남부 모하비 사막을 걷는 남자를 촬영한 '내적 통로'에서 남자는 사막 저편에 서 있는 희미한 점이었다가 점점 관객에게 가까워진다.

국제갤러리 바로 옆 학고재갤러리에선 그의 스승인 백남준(1932~2006)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스승과 제자의 전시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비올라는 시러큐스 대학 졸업반 때부터 백남준의 조수로 일했다. 스승의 이름을 꺼내자 그는 "오, 마이 갓!" 하며 두 손을 모아 하늘로 올렸다. "그는 나의 영웅이자 멘토이고, 최고의 마스터입니다. 남준은 늘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천재'라고 했지만 그야말로 진짜 천재였지요." 잠시 말을 멈춘 작가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가 스승과의 특별한 순간을 들려줬다. 1974년 어느 날 밤, 백남준이 'TV 가든'이란 작품을 설치하고 있었다. 밤새 비가 내렸고 이튿날 새벽 거의 작업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멎고, 한 줄기 빛이 비쳤다. 달이 밤하늘을 밝히며 떠있었다. "남준, 보세요!" 스승이 말했다. "달빛이 바로 하이 아트(high art), 내 비디오는 로 아트(low art)구나." 전시는 5월 3일까지.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