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죽어라 일하면? 죽어선 푹 쉴 수 있죠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5.01.29 00:34

바냐 삼촌

"우린 쉴 수 있어요~ 우린 편히 쉬는 거예요." 연극 '바냐 삼촌'(안톤 체호프 작, 이윤택 연출)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들이 부드러운 멜로디로 이 가사를 반복해 부르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꾹 참고 자기가 맡은 일에 몰두하면 죽고 나서 푹 쉴 수 있다'는 의미였다. 과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극본을 쓴다는 연출가 이윤택의 '워커홀릭 실존주의'라 할 만했다.

워크숍 작품을 제외하면, 이것은 이윤택의 첫 체호프 연극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뒤에야 체호프에 본격 입문한 셈이다. 왜? "그동안은 체호프 극을 제대로 표현할 정도로 배우들의 역량이 갖춰지지 못했다. 이건 스타니슬라프스키 연기론을 거치지 않은 (내 스타일의) 체호프 극이다."

‘바냐 삼촌’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이원희(바냐 역·오른쪽)와 박인화(소냐 역).
‘바냐 삼촌’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이원희(바냐 역·오른쪽)와 박인화(소냐 역). /연희단거리패 제공

'19세기 후반 제정러시아'라는 체호프 극의 시공간적 특수성에서 나오는 번역극의 이질감을 최대한 없앴다는 얘기다. 그 열쇠는 21세기 한국어의 일상적인 '입말', 치밀한 리듬과 강약의 각을 세워 감정을 분출하는 연기, 그리고 가족의 끈끈한 정이 묻어나는 한국적 정서다. 그 결과, 일견 지루하게 인식되던 체호프의 장막극은 왁자지껄한 북새통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통찰하는 신랄한 고추장 같은 희극으로 거듭났다. 관객은 금세 공감하게 된다.

어느 시골 마을, 피폐한 중년 바냐는 죽은 여동생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새장가를 든 매제 세례브랴코프가 그곳으로 오고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몇 겹의 치정(癡情)이 얽힌다. 교수인 매제가 시골 땅을 팔겠다고 하자 바냐의 분노가 폭발한다. "한푼어치 가치도 없는 책이나 써댄 당신 같은 사람에게 속아 내 한평생을 허비하다니!" 하지만 곧이어 영화 '대부'의 한 장면처럼 매제의 귀를 물어뜯는 장면에선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바냐 역의 이원희는 명료한 대사와 의도적으로 과장된 연기로 극을 폭풍처럼 몰고 갔다. 바냐의 질녀인 소냐 역의 박인화는 눈물을 쏟을 듯 울먹이다가도 새엄마에게 '엄마'라고 말하며 어색해서 입꼬리를 피식 올리는 디테일한 연기를 보였다. 세례브랴코프의 새아내 역을 맡은 김아라나와 마을 의사 역의 이승헌은 무척 밀도 높은 불륜 연기를 보여주는데, 두 배우는 이 연극의 마지막 공연일에 실제로 결혼식을 올린다.


▷2월 15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 공연 시간 110분, (02)763-1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