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생성과 소멸 속 시간을 담아내는 작가 ‘이정걸’

  • 아트조선

입력 : 2014.11.17 10:50 | 수정 : 2014.11.18 17:06

이정걸作 / Time Slice-14Years(6)’ / 126x117cm / 2012
이정걸作 / Time Slice-14Years(6)’ / 126x117cm / 2012

사라져버린 가을을 찾은 느낌이었다. 제법 먼 거리임에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거대한 화폭에 담긴 것은 가을 은행나무의 노랑. 무언가에 이끌려 한걸음 다시 한걸음 그림 앞으로 다가섰다. 눈앞에서 바라본 그 작품은 멀리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르다. 뒷면이 훤히 내비칠 정도로 어설프게 얽히고설킨 노란 빛깔의 리넨 같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랜 시간을 거치며 낡고 닳은 듯했다. 그리고 하나가 더 눈에 들어왔다. 선명하지도, 그렇다고 희미하지도 않은 붉은색 글씨였다.

TIME SLICE 14 years

가을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시린 바람이 불던 오후 역삼역 인근에 위치한 머큐어 앰배서더 강남 소도베 호텔 로비에서 작가 이정걸을 만났다. 현재 이 호텔 1층 레지나 아트갤러리와 건물 곳곳에 그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그가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생성과 소멸’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와 사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마주해야만 하는 진실이다. “소멸과 생성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해요. 소멸은 또 다른 생성의 시작이고 생성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제가 표현하는 것은 소멸과 생성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 시간의 조각(Time Slice)이에요.”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작가 이정걸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시간의 조각을 통해 소멸과 생성을 화폭에 남아내고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호텔 로비에 들어서며 처음 본 작품은 ‘Time Slice-14years(6)’. 14년간 시골 농가의 축사에 덮여있던 바람막이용 천막에서 겉면이 아닌 안쪽 천을 활용한 작품이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농가 주인에게 새로운 바람막이 천막을 사드릴 테니 오래된 천막을 달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냥 가져다 쓰라고 하시더라고요. 14년 동안 한자리에서 세월의 풍파를 겪은 천막을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제가 작품에서 추구하는 생성과 소멸이 떠올랐어요. 이 천막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이전에 주운 은행나무잎의 색을 보고 그대로 색을 만들어 입혔어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잎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은행나무 입장에서 본다면 소멸의 순간의 처절한 몸부림에 의해 발현된 결과물이잖아요. 그 모습이 우리의 삶, 생성과 소멸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정걸作 / Time Slice-1307 / 175.2x1140cm / 2013
이정걸作 / Time Slice-1307 / 175.2x1140cm / 2013

작가 이정걸의 다른 작품 역시 저마다 ‘생성과 소멸’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3년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Time Slice-1307’은 짧은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포를 형상화 한 작품이다. 여기에 단풍이 가진 수많은 종류의 색을 입혀 역동적이고 화려한 모습을 더했다. 작품을 큰 시각으로 바라보면 인간 형태의 실루엣이 보이는데, 이는 마네킹을 촬영한 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형상만 떼어내 확대한 후 작품을 손수 작업할 때 접목한 것이다. 특정한 인물의 실루엣이 아닌 마네킹의 실루엣을 사용한 이유는 ‘생성과 소멸’의 보편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과학실험 같은 작품활동

작가 이정걸의 작품을 보다 보면 ‘그렸다고 해야 할까,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라는 고민이 든다.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단순히 캔버스에 색을 입히는 것이 아니다. 평소 조금씩 모아둔 각종 골판지를 이용해 오려내고, 붙이고, 칠하기를 수십 번 반복하며 생각해온 상징적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 작업이 완성될 무렵에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컴퓨터로 옮긴 후 프로그램을 이용해 원하는 형태와 크기로 재정리한 것을 시트지로 컴퓨터 컷팅하고, 기본적인 효과가 처리된 화면 바탕 위에 시트지를 붙이고 필요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떼어낸다. 이후 스펀지나 롤러로 문지르거나 두들겨 프린팅 기법으로 찍은 후에 시트지 마저 떼어낸다. 여기까지가 기본적인 작업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바느질도 하고 주사기에 물감을 넣고 짜면서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할 새로운 기법을 연구하다가 봉변을 당한 적도 있다. “캔버스에 묽게 탄 물감을 칠해놓고 촛농을 떨어뜨려 자연스럽게 번지는 모양을 만드는 방법으로 작업을 하는 중이었어요. 그러다가 캔버스에 불이 잘못 붙어 작업실과 작업실에 있던 모든 작품이 다 타버렸어요.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에요.”

작가 이정걸
작가 이정걸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작품을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한다. ‘작품은 나다워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다. 누군가 해왔던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을 표현할 수 있는 것,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예술가의 고집인 셈이다. 또한, 은행나무가 처절한 몸부림을 겪으며 아름다운 노란 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고된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고자 하는 철저한 직업의식이다.

“작가는 저의 천직이에요. 즐길 수 있고, 잘할 수 있고, 좋아하니까요. 때로는 고된 상황이 오기도 하지만 매 순간 작품에 대해 고민하고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저는 행복해져 있어요.”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성과 소멸 사이의 한 조각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해내는 작가 이정걸, 앞으로 그가 표현해 낼 무수히 많은 ‘시간의 조각’이 기대된다.

본 전시는 11월20일 까지 계속되며, 작가의 작품을 담은 스카프와 넥타이는 역삼동 머큐어 앰배서더 소도베 호텔에서 연말까지 전시,판매 예정이다.

조선닷컴 라이프미디어팀 정재균 PD jeongsan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