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 리뷰] 청중을 들었다 놨다… 건반으로 사람 홀리네

  • 김기철 기자

입력 : 2014.10.16 00:45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

베토벤이나 리스트는 이 피아니스트가 못마땅할지도 모르겠다. 스물세 살 더벅머리 젊은이가 템포는 제멋대로 줄였다 늘였다 하고 곡 순서도 마음대로 바꿔서 연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1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한 다닐 트리포노프(Trifonov·23)는 청중들을 숨소리 한 번 크게 못 내게 쥐락펴락할 만큼 대단한 집중력과 힘을 발휘했다.

스무 살에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루빈스타인 콩쿠르 우승을 동시에 거머쥔 트리포노프는 이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표를 삼킨 후 소화해서 손가락을 통해 다시 뱉어내는 것 같았다. 베토벤과 리스트의 작품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그가 건반 위에 새 작품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트리포노프는 입술이 건반에 닿을 듯, 머리를 숙이고 연주에 몰입했다.
트리포노프는 입술이 건반에 닿을 듯, 머리를 숙이고 연주에 몰입했다. 청중들도 숨죽이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바흐의 환상곡과 푸가로 시작한 트리포노프는 베토벤 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32번에서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시작부터 욕심을 낸 트리포노프는 엄청난 속도를 못 이겨 건반을 건너뛰거나 음이 뭉개지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2악장에선 셈여림의 극단적 대비로 이게 그 곡이 맞나 싶을 만큼 극한으로 몰고 갔다. 분명한 것은, 과하다 싶을 만큼의 빠른 템포와 셈여림의 대비가 트리포노프만의 색깔을 분명하게 보여줬고, 입술이 건반에 닿을 듯 피아노 앞에 웅크리고 한 음 한 음 정성을 들인 집중력 덕분에 청중들의 몰입도 함께 고조됐다.

휴식 시간 후 트리포노프는 땀을 많이 흘린 탓인지 재킷을 벗고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나왔다. 전반부와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건반을 짚어나갔다. 12개로 이뤄진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자신이 정한 순서에 따라 바꿔서 연주했는데, 1시간이 넘는다고 했던 프로그램 노트와 달리 50분 만에 해치웠다.(알고 보니, 2개는 생략했다) 마지막 앙코르인 바흐의 파르티타 3번이 끝날 때까지 청중들은 숨죽인 채, 피아니스트의 동작 하나하나에 빠져들었다. 콘서트홀을 나서는데, 뭔가에 홀렸다가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