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네온은 고상지로 통한다

  • 한현우 기자

입력 : 2014.09.29 03:02 | 수정 : 2014.09.29 10:28

카이스트 자퇴 후 탱고에 흥미… 직접 아르헨티나 건너가 배워
"자퇴 후회없어, 매일이 행복"

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살아도 인생은 얼마나 빛나는가.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31)가 걸어온 길을 보면 그가 이 아르헨티나 탱고 악기에 몰두해 온 10년이 그 이전의 20년보다 훨씬 더 촘촘하게 빛나왔음을 알 수 있다. '공부 말고는 잘하는 게 없었던' 그는 카이스트 토목공학과에 01학번으로 입학했다가 몸이 아파 휴학한 뒤 탱고에 흥미를 갖게 됐다. 3년 후 복학했으나 이내 자퇴했다. 이후 일본 최고의 반도네온 연주자 고마츠 료타를 사사하고, 아르헨티나에 건너가 2년간 반도네온을 배웠다. 반도네온은 아코디언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아르헨티나 탱고에 주로 쓰이는 악기다.

"작년 5월에 결핵에 걸렸을 때 혹시 내가 빨리 죽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그렇다면 이때까지 쓴 곡이라도 녹음하자 해서 6곡을 녹음했는데, 죽을 병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좀 더 녹음했지요." 첫 앨범 '마이크그레 1.0'을 내놓은 그를 최근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났다. '마이크그레(maycgre)'는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6명의 이름을 조합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보고 컴퓨터 게임을 해 온 그는 "고마츠 료타에게서 반도네온을 배운 것 말고 인생의 모든 것을 애니메이션에서 배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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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지의 반도네온은 일본 거장 고마츠 료타에게서 선물받은 것이다. 그는“고마츠 선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반도네온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탱고를 좋아하고 나서 1년 뒤쯤 반도네온에 관심 갖게 됐어요. 아르헨티나 사는 이모가 악기를 보내주셨고 일주일 만에 거리 연주를 시작했어요. 워낙 흔치 않은 악기여서 그런지 시선을 끌었죠." 그는 김동률·정재형·윤상과 함께 작업했고, 첼리스트 송영훈과도 협연했다. 다들 "한국에서 모든 반도네온은 고상지로 통한다"고 말했다. 정작 그는 "공부보다 10배 이상 노력해도 공부만큼 잘하지 못하는 게 반도네온"이라고 했다.

가운데 주름상자가 있고 왼쪽에 33개, 오른쪽에 38개 버튼이 달린 반도네온은 어쿠스틱 기타나 현악기와 어울려 어떤 악기 못지않게 풍성한 감정을 표현한다. 첫 곡 '출격'은 반도네온이 맨 앞장서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첼로가 학의 날개처럼 감싸며 앞으로 진군하고, 베이스가 저 뒤에서 독려의 저음(低音)을 울린다. '빗물 고인 방'은 결국 떠나가는 미운 사람의 뒷모습에서 눈 떼지 못하는 이의 복잡한 심사가 떠오르는 발라드다.

고상지는 'Envy(부러움)'란 곡 설명에서 "부러움과 질투는 항상 내 삶을 지배하는 바탕이자 우울함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는 "내 인생에서 당당했을 때는 카이스트 입학했을 때 정도였고 그 직후에 음악 동아리 들어가서 남보다 연주 못한다는 열등감에 휩싸였다"고 했다.

그녀는 대학 자퇴한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했다. "장래 취직 때문에 아까운 거겠죠. 그렇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게 왜 아까워요? 내가 서른 살이 됐다는 건 30년간 한 번도 죽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아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죠." 그는 분명히 오늘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내일 걱정투성이인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10월 25일 서울 백암아트홀에서 열리는 그의 첫 콘서트에서 그 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 공연문의 (02)563-0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