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은은한 촛불처럼… 일상의 비극을 끌어안다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4.08.26 00:28

유리 동물원

‘유리 동물원’의 주인공 톰(이승주·왼쪽)과 엄마 아만다(김성녀·가운데), 누나 로라(정운선).
‘유리 동물원’의 주인공 톰(이승주·왼쪽)과 엄마 아만다(김성녀·가운데), 누나 로라(정운선). /명동예술극장 제공
불협화음이 섞인 첼로 독주가 연극 내내 이어진다. 원작의 바이올린보다 훨씬 둔중하고 치명적인 이 음색은 주인공 톰의 내면을 표현한다. 그는 불안하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회상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보인다. 아예 해설자로 나선 그가 못을 박는다. "이 연극은 하나의 기억이며, 조명은 비현실적으로 어슴푸레하며 센티멘털하다"고.

한태숙 연출의 연극 '유리 동물원(The Glass Menagerie)'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1944년 고전 희곡을 시공간에 관계없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재창조했다. 대공황기인 1930년대 엄마와 남매로 이뤄진 빈곤한 가정이 있다. 그들은 모두 과거의 화려했던 기억에 매달려 눈앞의 참담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 아들 톰(이승주)이 누나 로라(정운선)의 신랑감으로 직장 동료 짐(심완준)을 데리고 오자 엄마 아만다(김성녀)는 잠시 희망을 품지만, 모두 물거품이 돼 버린 뒤 톰은 집을 떠난다.

최근 '서안화차'와 창극 '장화홍련' 등 충격적이고 괴기스러운 작품을 무대에 올린 연출가 한태숙은 이 연극에선 따뜻한 색조의 유화로 '일상의 비극'을 잔잔하게 다룬다. 마치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중 '시계태엽 오렌지' '샤이닝' 같은 난폭한 작품 사이에 '배리 린든'이 끼어 있는 것처럼. '배리 린든'과 마찬가지로 '유리 동물원'도 은은한 촛불 조명으로 배우들을 감싸 안는다. 꿈을 꾸는 듯한 낭만의 화신처럼 연기하는 아만다 역의 김성녀는 깊은 인상을 더한다.

연극이 말하는 것은 중산층의 몰락이나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의 허위에 대한 조소만이 아니다. 누나 로라가 탐닉하는 유리 동물들의 영롱한 빛은 날개 꺾인 자들이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는 가냘픈 존엄과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가족을 저버린 톰은 끝내 누나가 켠 촛불의 잔상(殘像)을 떨치지 못한다. 한태숙은 말한다. "시대가 변해도 우리는 가족이란 족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족은 가장 현실적인 짐인 동시에 가장 이상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3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공연 시간 150분(인터미션 포함),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