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가 끝내 못간 제주항서… 백건우의 피아노가 울었다

  • 제주=허윤희 기자

입력 : 2014.07.25 01:16

참사 100일, 추모 독주회

수평선 위에 금빛 석양이 걸렸다. 부둣가 등대 옆에 마련한 간이 무대에 백건우(68)가 검은 옷을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800여 청중이 숨을 죽였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후, 그가 연주를 시작했다.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비창' 2악장. 느리고 애잔한 선율이 한여름 바닷바람을 타고 흘렀다.

24일 오후 7시 30분 제주항 제7부두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백건우의 영혼을 위한 소나타' 독주회가 열렸다. 세월호 사고가 난 지 100일째 되는 날. 세월호가 끝내 도착하지 못한 제주항에서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마련됐다.

백씨는 프랑스 파리에서 부다페스트 음악회를 준비하다가 세월호 참사 뉴스를 접했다. 그는 "화를 참을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팸플릿에도 그 심경을 적었다. "…그래서 저는 오직 음악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인 음악으로 마음을 전하려 합니다."

세월호가 끝내 도착하지 못했던 제주항에서 백건우가 추모의 마음을 담아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희생자와 가족들에게 우리가 함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세월호가 끝내 도착하지 못했던 제주항에서 백건우가 추모의 마음을 담아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희생자와 가족들에게 우리가 함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종현 객원기자
그는 무대에서 6곡을 연주했다. 죽음과 상처, 치유와 희망이란 주제를 갖고 선정한 곡이다. 첫 곡 '비창'은 베토벤이 산책길에 나섰다가 병으로 죽은 자식 앞에서 슬퍼하는 여성을 발견한 뒤 위로하기 위해 즉흥으로 연주한 곡. "베토벤은 이 곡을 연주한 뒤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는데 내 마음도 그렇다"고 했다.

이어서 리스트의 '잠 못 이루는 밤, 질문과 답'과 '침울한 곤돌라 2번',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차례로 흘렀다. 담담하지만 애처로운 피아노 선율이, 모두에게 "괜찮다" 다독이듯 항구를 감쌌다. 파도는 잔잔했고 무대 뒤로는 평소처럼 여객선과 화물선이 드나들었다.

이날 공연은 전석 무료. 백씨도 출연료를 받지 않았다. 선착순으로 예약한 600명에 인근 주민 200여명이 더 몰려와 그의 연주를 들었다. 공연을 주최한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은 "유가족뿐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위안을 받아야 한다. 모두가 같이 치유하고 해결책을 찾자는 뜻"이라고 했다.

마지막 두 곡은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음악이다. 리스트의 '순례의 해' 3년 중 '힘을 내라(Sursum Corda)'와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사랑의 죽음'. 특히 피날레를 장식한 '사랑의 죽음'은 시간과 장소, 죽음까지 초월하는 사랑을 노래한다. 바그너의 '무한 선율'이 빛의 다발처럼 공중에 흩뿌려졌다. 끊어질 듯 계속되는 선율처럼, 그는 희망을 연주하고 있었다. 공연 뒤 탈진해 내려온 그가 말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잖아요. 좀 더 나은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청중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제주시 연동에서 왔다는 박소운(63)씨는 "첫 곡부터 뉴스에서 봤던 배 안의 아이들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라도 그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