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셋의 격정적 아리아… 1만2000명 마음 적셨네

  • 베로나(이탈리아)=김기철 기자

입력 : 2014.07.21 00:06

[伊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 플라시도 도밍고 리사이틀 가보니]

테너서 전향한 바리톤 도밍고… 최승필 등 후배들과 함께 무대
말레이機 애도 묵념으로 시작… 심야 소나기로 1부만 진행돼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
"공연에 앞서 최근 타계한 마에스트로 로린 마젤과 우크라이나 비행기 참사로 세상을 뜬 이들을 위한 묵념을 하겠습니다."

17일 밤 10시(현지 시각) 이탈리아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리는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 아레나(Arena).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영어 순으로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아레나를 가득 채운 관객 1만2000명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날은 세계적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73·사진)의 베르디 아리아 리사이틀이 열리는 날. 출범 101주년을 맞은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 중 가장 기대를 모은 공연이었다. 하지만 이날 오후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가 우크라이나에서 추락, 탑승 인원 298명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는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공연장 보안도 더 철저해졌다. 생수나 음료수 병은 마개를 딴 채로만 공연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묵념이 끝나고, 관객들이 하나둘씩 촛불을 밝히면서 리사이틀이 시작됐다. 이스라엘 출신 지휘자 다니엘 오렌이 지휘한 베로나 아레나 오케스트라가 '라 트라비아타' 서곡을 연주했다. 도밍고는 이날 후배 성악가들과 함께 '라 트라비아타''가면무도회''포스카리가(家)의 두 사람' 등 베르디 오페라 3편 아리아를 부를 예정이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스리 테너'로 유명했던 도밍고는 몇년 전부터 바리톤으로 방향을 바꿨다. 풍성하고 탄탄한 고음을 자랑하며 한창때 즐겨 불렀던 '라 트라비아타' 주역 알프레도 대신, 아버지 제르몽을 불렀다. 은발의 도밍고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원숙한 목소리와 연기로 풀어냈다. 비올레타 역을 맡은 아르헨티나 출신 소프라노 톨라(Tola)와 함께한 '친애하는 발레리 부인', 알프레도 역 프란체스코 멜리(Meli)를 달래던 '프로방스, 내 고향으로'는 열렬한 박수를 끌어냈다. '가면무도회'에서도 테너 리카르도 대신, 리카르도의 충직한 신하 레나토를 불렀다. 아내와 주군(主君)의 부정을 알게 된 레나토가 '너였구나, 내 영혼을 더럽힌 자가'를 부를 때, 도밍고는 배신당한 분노에 떠는 격정의 사나이였다. 올해 베로나 오페라 '가면무도회'에 출연하는 베이스 최승필도 도밍고와 함께 4중창, 5중창을 부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지난 17일 밤 열린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도밍고 리사이틀.
지난 17일 밤 열린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도밍고 리사이틀. 1만명이 넘는 관객이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인 아레나를 가득 채웠다. /베로나 페스티벌 제공
1시간 20분가량의 1부가 마칠 무렵, 아레나 하늘 위로 번개가 번쩍였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 비행기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듯한 비였다. 자정을 넘기도록 공연은 열리지 못했다. 관객들은 불평 한마디 없었다. 새벽 1시쯤 공연을 완전히 중단한다는 안내가 나왔다. 제의(祭儀)를 올리듯, 묵묵히 기다리던 관객들은 그제야 아레나를 나섰다.


☞베로나 축제

이탈리아 베로나의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Arena)을 무대로 활용한 오페라 축제. 1913년 시작됐으며 올해는 6월 20일~9월 7일 열린다. ‘나비 부인’ 등 오페라 6편을 포함, 54차례 공연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