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하는 '국산 햄릿' 런던 상륙

  • 런던=김기철 기자

입력 : 2014.07.14 00:52

양정웅, 샤머니즘으로 햄릿 재구성…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에 초청
북·꽹과리·방울소리가 청각 자극, 쌀 던지며 굿하는 장면 인상적

굿과 샤머니즘으로 무장한 '햄릿'이 셰익스피어의 본고장 런던 웨스트엔드에 상륙했다. 12일 저녁 런던 정경대(LSE) 근처 포르투갈가(街) 피콕 극장. 2006년 바비칸 센터, 2012년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 등 영국 연극 심장부에서 셰익스피어 '한여름밤의 꿈'을 올려 주목받았던 극단 여행자(대표 양정웅)의 '햄릿'이 올라갔다. 올해 '서울'을 주제로 삼은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에서 가장 기대를 모은 한국 작품이다.

햄릿(전중용)은 2막에 나올 그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첫 등장 장면부터 쏟아냈다. 아버지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입었던 검은 상복을 팬티까지 벗어 던지면서 전신 노출을 감행했다. 시작부터 탄성이 흘러나왔다. 극 중 내내 햄릿이 입은 의상은 흰 추리닝(트레이닝복).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숙부와 불륜의 어머니에 대한 반항을 담아냈다.

지난 12일 런던 피콕 극장에서 열린 극단 여행자의 ‘햄릿’ 공연. 한국 전통 굿과 무속으로 해석한 셰익스피어로 호평을 받았다
지난 12일 런던 피콕 극장에서 열린 극단 여행자의 ‘햄릿’ 공연. 한국 전통 굿과 무속으로 해석한 셰익스피어로 호평을 받았다.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 제공
'양정웅 표 햄릿'은 떠들썩했다. 북과 꽹과리, 장구는 물론 무녀의 노랫가락, 방울 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햄릿은 사각형 무대 가장자리에 깔린 쌀 2t(한국 상표를 단 미국 쌀) 위를 뛰어다니다 한 움큼씩 집어던지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무신도(巫神圖)가 사방에 깔린 무대 위를 맨발의 배우들이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에너지를 발산했다.

햄릿이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는 장면은 '진오기굿'으로 처리했다. 햄릿의 부탁으로 죽은 자를 위한 굿을 펼치던 무당 세 명은 억울한 죽음과 복수를 부탁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중개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쓸 때, 햄릿과 아버지의 만남을 이렇게 처리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그럴듯했다. 물에 빠져 죽은 오필리어를 추모할 때, 독 묻은 칼을 맞고 햄릿이 죽을 때 등장한 굿 장면도 해외 관객들에게 인상적일 법했다.

관객들의 호응이 가장 좋았던 장면은 탈을 쓴 배우 2명이 과장된 몸짓을 연기하고, 다른 배우 2명이 변사처럼 목소리 연기를 펼치는 대목이었다. 무성영화 같은 장면인데, 희극성이 두드러졌다.

양정웅은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스' '리어왕' 등 셰익스피어 원작에 한국 전통의 색깔을 입혀 주목받아온 연출가. 2009년 11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한 '햄릿'은 2010년 호주 애들레이드 오즈아시아(OzAsia) 축제, 2011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셰익스피어 축제에 초청받는 등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날 '햄릿' 공연장엔 현지 관객과 한인 교포·유학생 700명이 고루 섞였다. 옥스퍼드 플레이하우스 디렉터 루이스 찬탈(Chantal)은 "시각적으로 매우 뛰어난 햄릿이었다. 장례식 장면을 특히 흥미롭게 봤다"고 했다. 폴 거진(Gudgin)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 위원장은 "250여개 페스티벌 참가작 중 '햄릿'은 개인적으로 '톱(Top) 3' 안에 꼽을 만큼 예술적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연극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