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7.03 00:59
안데르센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이 낡은 가방을 들고 무대에 나타난다. 극장 관리인은 소년이 보낸 대본이 철자법도 문장도 엉망이라며 집어던진다. 소년은 "저는 제 생각과 마음으로 이 세상의 말을 전하는 법을 배웠다"며 자신이 쓴 대본 일곱 편을 차례로 들려 준다. '미운 오리새끼'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 소년의 이름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가족극(家族劇)이란 장르가 대충 만든 아동극 취급받는 현실에서 연극 '안데르센'(이윤택 작, 이윤주 연출)은 진정한 '가족극'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이다. '어른을 위한 몽상극'이란 부제에서 볼 수 있듯 이것은 결국 자아(自我)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처절한 방랑기다. 작가 이윤택은 고백한다. "비루한 세상에 내던져진 소년이 고립되고 결핍된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밑도 끝도 없이 빠져들었던 독서와 몽상의 시간. 안데르센의 동화는 바로 이 결핍된 영혼이 빚어낸 불굴의 상상력이었다."
어른의 시각에서 재현되는 동화들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쓸모없는 여자'에는 신분과 계층의 두꺼운 벽 앞에서 좌절하다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고통스러운 의지가 있고, '길동무'에 등장하는 오만한 공주에게선 '남자에게 사악하지 않은 여자는 없다'는 성적(性的) 염세주의가 드러난다. '프시케'에 영원불멸의 예술에 대한 희구와 몽상이 있다면,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 '놋쇠 병정'에는 모진 세파에 상처받은 어린 영혼의 상흔(傷痕)이 뚜렷하다. 언어 못지않게 몸을 잘 쓰는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은 그림자놀이, 종이 인형, 인형 마임 같은 다채로운 형식으로 이 이야기들을 무대에 마술처럼 펼쳐낸다.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다 들은 극장 관리인은 그의 후원자가 되기로 약속하고는 조용히 속삭인다. "꿈꾸는 자만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지. … 가혹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꿈을 꾸고 글을 써대야 할 거야." 울컥,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는 어른들이 객석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6일까지 서계동 국립극단 소극장 판, 공연시간 120분, 1688-5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