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달콤할 수 없어… 마지막까지 치열할 수밖에

  • 여주=김미리 기자

입력 : 2014.06.27 03:02 | 수정 : 2014.06.27 09:56

-한국 單色畵 1세대 정상화 화백
40여년간 같은 스타일로만 작업… 고령토 칠하고 떼면서 바탕 만들어
"결과물 아닌 과정 그 자체가 작품"

25일 경기 여주시 산북면. 시골에서도 보기 어려운 비포장 비탈길을 차로 꽤 달렸다. 흰 베레모를 쓴 정상화 화백이 스무 해를 함께 산 진돗개 졸리를 데리고 작업실 문 앞으로 나왔다. 권위보다는 배려가 몸에 밴 여든둘의 노(老) 화가는 "귀한 손님은 동(東)으로 모시는 법"이라며 굳이 집 한 바퀴를 돌아 동쪽 출입문을 향했다.

문을 살포시 밀고 수발드는 딸조차 출입제한구역이라는 화백의 작업실에 발을 내디뎠다. 대형 캔버스를 올릴 수 있게 탁구대 4개를 이은 작업대, 합판을 죽죽 잘라 만든 긴 나무 자, 편히 앉아 물감 갤 수 있도록 만든 스펀지를 덧댄 플라스틱 목욕 의자, 공사용 끌…. 정 화백 작업실은 60여년 미술 실험 끝에 얻은 화구(畵具) 집합소였다. "아무도 하지 않는 방식이기에 기성 도구들은 맞지 않았어요. 공사장에서, 철물점에서, 시장에서 그러모아 다시 만들었지요. 쓰레기 더미지, 뭐." 정 화백이 천진무구한 눈빛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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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산북면에 있는 정상화 화백의 작업실은 작은 화구 집합소다. 시행착오 끝에 만든 그만의 도구들이 최적의 동선 안에 들어 있다. /김지호 기자
소소한 작업실 용품들이 대변하듯 평생 자신만의 방법으로 작품 해 온 그다. 60여년을 그렸고, 그중 1970년대부터 40여년간은 오로지 한 스타일의 단색화(單色畵·모노크롬)에 몰두했다. 단색화는 이미지를 제거하고 단일한 색조의 반복적인 작업으로 평면을 표현하는 추상 기법으로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도됐다. 정 화백은 1세대 단색화 대표주자다. 최근 한국 단색화가 국내외에서 재평가받으면서 그의 그림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1일부터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리는 것도 이런 관심의 반영이다.

"세상이 파괴적으로 변하니 무표정한 단색화로 눈을 돌리게 되나 봐요. 그러나 이 또한 다 지나가는 바람일 뿐…."초야(草野)에 묻혀 오로지 작품에만 몰두하는 정 화백은 초연했다. "나는 외풍에 상관없이 그저 '일'할 뿐이에요. 예전에도 일했고 지금도 일하고, 눈 감을 그 순간까지도 일할 거예요." 작가는 내내 '그림' '작업'이란 표현 대신 '일'이란 단어를 썼다.

왜 '일'인 걸까. "난 '그리지' 않아요. 들어낸다, 메운다, 접는다, 꺾는다…. 그러니 내가 하는 게 '일'이 아니고 뭐예요. 이건 '노동'이지요." 그의 작업 과정을 보면 선문답 같은 대화가 이해된다. 캔버스 천을 나무 틀에 씌우고 고령토를 바른 뒤 마르기를 기다려 떼낸다. 그 위에 물감을 칠하는 복잡한 과정을 적어도 한 달 이상 반복하면 작품의 바탕이요 뿌리였던 고령토는 사라진다.

정상화 화백 '단색화' 작업 과정.
결국 사라질 운명이라면 왜 고령토는 바르는 걸까. 정 화백은 "고령토는 평면에 힘을 축적시키는 나의 방법론"이라고 했다. "죽 그었다고 해서 선(線)이 아니요, 평평하다고 해서 면(面)이 아니요, 비워뒀다고 공간(空間)이 아니에요. 이 모든 것은 작업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겁니다. 고령토와 물감을 들어냈다 메우는 과정에서 선, 면, 공간이 자연히 발생하지요." 정 화백이 자신의 작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라고 말하는 이유다. 무심하고 때로 단조로워 보이는 정 화백의 화면 안에는 보이지 않는 수고와 땀, 시간이 응축돼 있다.

작가는 5년 전 대장암 투병을 했지만 요즘도 새벽 5시면 일어나 식사 시간을 빼고 자정까지 작업한다. 그렇게 60여년을 '일'했다. "할 만큼 했다는 느낌도 들어요. 그러나 아직도 내 머릿속 생각의 실체가 보이지 않아요. 치열하게 일할 수밖에. 나는 결코 달콤하게 캔버스와 닿고 싶지 않아요. 마지막 숨 쉬는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