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6.26 00:56
[이중섭 그림 재현한 연극 '길 떠나는 가족' 개막]
23년 전 연극상 휩쓸었던 작품… 이윤택 연출로 다시 무대 올라
이데올로기 요소 약해지고 매회 직접 '황소' 그려내기도
이 작품은 1991년 10월 1일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주요 연극상을 휩쓸며 전설이 됐으나, 이윤택의 연출로는 1992년까지 국내에서 딱 13일만 공연됐다.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李仲燮·1916~1956)의 삶과 예술혼을 그린 이 연극엔 김갑수·김성원·나문희·김학철 등이 출연했었다. 한 세대를 뛰어넘은 지금, 그 연극이 같은 연출가에 의해 다시 무대에 오른 것이다. 과연 23년 전과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기자는 대학생 때 본 초연과 이번 공연을 비교하며 관람했다.
①명암(明暗)이 뚜렷해진 연출
"왜 그림을 그리느냐고?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누가 내 손을 붙잡고 붓질을 하게 한다면, 난 내 손목을 꺾을 거야." 이번 공연에서 이중섭의 이 대사는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장면전환은 긴박해졌고 주인공을 둘러싼 갈등은 더 뚜렷해졌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좌절'이라는 주제 의식이 선명해진 것이다. 초연은 배우 30명이 출연해서 상대적으로 느슨했으나, 이번엔 14명으로 줄이고 앙상블(여러 단역을 돌아가며 하는 배우)의 비중과 연기력을 키워 밀도를 높였다.
②'고뇌하는 지식인'에서 '다면적 예술가'로
당시 주연을 맡았던 김갑수는 날 선 광기(狂氣)를 표출하는 연기로 '고뇌하는 지식인 이중섭'을 보여줬으나, 이번 주연인 지현준은 순진함·유머·열망·따뜻함 같은 여러 감정을 풍부하게 드러내는 '다면적 예술가 이중섭'으로 거듭났다. 이윤택은 "이중섭의 성격에서 '각'을 많이 뺐다"고 설명했다. 연기는 물론 미술 연습까지 몰두한 지현준은 매회 5분 만에 '황소'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도 벌인다.
③업그레이드된 무대미술
극의 하이라이트는 이중섭의 그림 '길 떠나는 가족'(현재 부산시립미술관'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전 전시 중)을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연극적으로 재현하는 장면. 초연 때도 관객에게 충격을 줬던 이 장면에 이영란 미술감독이 만든 소·아이·게·물고기·나비 같은 예술 작품 수준의 오브제(사물)를 더해 세련미를 끌어올렸다. 첩첩산중을 표현한 산과 포장마차·가방에서부터 돈까지 모든 소품을 목탄화로 표현한 것도 신선했다.
④가벼워진 '민족'과 '이념'
초연에서 이중섭의 일본인 스승은 기모노를 입고 나와 "자네 그림은 피카소나 마티스의 모작"이라 혹평하지만 이번엔 의상을 양복으로 바꿨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중섭의 대사 중 "오마니, 이게 다 김일성 때문이야요"란 말이 있었으나 이번엔 빠졌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민족감정과 이데올로기 같은 무거운 요소를 누그러뜨린 것이다. 반면 이중섭이 월남하기 전 스탈린의 초상화에서 수염을 그리지 않아 탄압받는 장면은 더 극적으로 표현했다.
▷7월 13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공연시간 100분,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