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 악마 있다… 연극판 50년 구른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4.06.11 00:49

에세이 출간한 원로배우 권성덕씨

"각하께서 오십니다." 1995년 6월 정동극장의 개관작 '허생전' 공연 첫날에 김영삼 대통령이 연극을 보러 오겠다는 전갈이 왔다. '드디어 현직 대통령께서 연극 관람을!' 권성덕 국립극단장은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대통령은 다음 스케줄이 있다며 공연 도중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우들은 모두 현관으로 나가 대통령을 배웅해야 했다. 원로 배우 장민호씨가 "성덕아, 이건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며 탄식했다.

"중간에 나가려면 애당초 오시지 않는 편이 나았지요…. 주변 분들이 대통령을 잘못 모신 겁니다." 2002년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원로 배우 권성덕(74)씨는 최근 출간한 에세이 '대통령도 되고 거지도 되고'(도서출판 동행)에서 이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다니다 1965년 배우로 데뷔해 지금까지 170여편의 연극에 출연한 권씨는 틈틈이 '월간 에세이' 등에 글을 발표했고 '연극배우 50년 기념'으로 이번 책을 냈다.

후배 배우들에 대한 조언을 묻자 권성덕씨는 “책을 많이 읽고 운동을 해야 한다. 간접 체험이 없으면 연기가 안 되고, 힘이 없으면 발성(發聲)을 못한다”고 했다
후배 배우들에 대한 조언을 묻자 권성덕씨는 “책을 많이 읽고 운동을 해야 한다. 간접 체험이 없으면 연기가 안 되고, 힘이 없으면 발성(發聲)을 못한다”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권씨의 책은 기록이 드문 우리 연극계에서 귀중한 사료(史料)다. 배우 김동원·추송웅·함현진, 연출가 이진순·김상열 등 고인이 된 연극인들에 대해 기록했고, 1994~95년 국립극단장 시절의 비화들도 꼼꼼히 담았다. "작가와 배우를 다 뭉개버리면 혼자 연극을 하겠다는 것인가?"라며 일부 연출가를 꾸짖는가 하면, "배우는 동류(同類)의 고등동물인 사람의 감정을 휘어잡는 사냥꾼"이라며 후배 배우들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철학이 없는 시대에 그나마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곳이 연극판이지요. 돈 굴러가는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 데지만, 그래도 계속 모시옷 한올 한올 짜듯 수공업적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는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파우스트'의 메피스토처럼 악역을 맡았을 때 훨씬 더 신이 난다고 했다. "착한 역할은 재미가 없어서… 내 속에 악마가 숨어 있나 봐요. 하하." 그는 다음 달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안톤 체호프 원작 '이바노프'로 다시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