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춤, 그 자체가 애도였다

  • 베오그라드(세르비아)=유석재 기자

입력 : 2014.05.26 00:10

세르비아 水害 위로한 국립발레단… 한국·세르비아 수교 25주년 공연

발레 '돈키호테'의 파드되(2인무)는 도도하면서도 우아했다. 김윤식의 팔에 안겨 공중으로 도약한 박예은은 물속을 유영하듯 부드럽게 상체를 낙하했다. 춤이 끝나고 큰 박수가 터지자 2층 객석 구석에서 무대를 지켜보던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원래 이번 공연은 애도 기간이라 프로그램 사이 박수를 모두 생략한다고 했었거든요…." 모두들 도저히 박수를 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예술적 감흥이 컸던 것이다.

22일 저녁(현지 시각)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국립극장에서 열린 한국·세르비아 수교 25주년 기념 국립발레단 갈라(gala) 공연은, 이날 세르비아 전국을 통틀어 유일하게 무대에 오른 공연이었다.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중심 국가인 세르비아는 이달 중순 120년 만의 큰 홍수가 일어나 사망·실종자가 600여명으로 집계되고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21~23일을 애도 기간으로 설정해 전국의 모든 공연을 취소했다. 국립발레단 공연은 22~23일로 잡혀 있었다.

지난 22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국립극장에서 열린 한국·세르비아 수교 25주년 기념 국립발레단 갈라공연에서‘지젤’2막에 출연한 김지영(가운데 손든 무용수)과 이영철이 파드되(2인무)를 추고 있다.
지난 22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국립극장에서 열린 한국·세르비아 수교 25주년 기념 국립발레단 갈라공연에서‘지젤’2막에 출연한 김지영(가운데 손든 무용수)과 이영철이 파드되(2인무)를 추고 있다. /국립발레단 제공
"애도를 위해서라도 공연을 해야 한다"는 김광근 주(駐)세르비아 대사의 설득 끝에 세르비아 정부는 "중요한 외교 행사인 이 공연만 예외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막이 오르기 전 500석의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과 무대 뒤의 출연자들은 모두 일어나 홍수 희생자를 위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침울했던 분위기는, 강수진 단장의 표현대로 '현 국립발레단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과 무용수들' 앞에서 금세 바뀌었다. 두 번째 무대는 국립발레단이 이날 처음 선보인 강 단장의 새 레퍼토리 '홀베르그'의 파드되. 김현웅이 힘찬 투르 앙 레르(공중에서 몸 전체를 회전시키는 동작)를 펼치자 "브라보!"라는 탄성이 터졌다. 몸을 비스듬히 일자(一字)로 기울이는 이은원의 춤에도 갈채가 쏟아졌다.

이수희 등 6명의 발레리노는 창작 발레 '왕자 호동'의 장중한 검무(劍舞)에 나섰다. 많은 현지 관객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꼽은 무대였다. 마지막 프로그램인 '지젤' 2막에서 유려하면서도 섬세한 김지영의 동작은 검푸른 색조의 조명을 받아 몽환적인 춤으로 승화했고, 그 자체가 홍수 희생자를 애도하는 무대처럼 보였다.

관객 보리슬라브 코르코델로비치(전 국영 탄유그통신 기자)씨는 "한국 국립발레단 솔리스트들의 실력이 무척 뛰어났고, 단원들 간의 호흡도 잘 맞았다"며 "한국이 경제적으로만 발전한 줄 알았는데 발레 같은 문화 방면에서도 세계 수준인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23일까지 이어진 이번 국립발레단 세르비아 갈라 공연의 티켓 판매 수익금 전액은 세르비아 수해 이재민을 위한 성금으로 기부된다. 국립발레단은 이달 초 '해설이 있는 전막발레 돈키호테'의 수익금 전액을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위한 성금으로 내기로 결정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