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이놈!

  • 김기철 기자

입력 : 2014.05.20 00:38

[명창 안숙선, '토끼타령'으로 초기 창극 재현]

전통 마루·한옥 서까래의 공연장
전자 음향기기 의존하지 않고 목소리로만 천장·바닥 울리게 해

안숙선 명창은 “한옥 대청마루에서 여유롭게 즐기는 명품 국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안숙선 명창은 “한옥 대청마루에서 여유롭게 즐기는 명품 국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국립국악원 제공
"내가 집 떠났단 소문이 나면 저 건너 진털 밭 남생이란 놈이 내 집을 종종 찾아다닐는지 몰라! 그놈이 밤중에 오더라도 노랑내가 심히 나니 각별히 조심하소."

용왕님 약으로 쓸 토끼 간을 구하기 위해 육지로 떠나는 별주부가 너스레를 떨자 아내 역 안숙선(65)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이 따끔하게 말했다. "자네는 냄새 안 나는 줄 아나. 아예 돌아오지 말게. 난 현빈이 더 좋아." 연습장이 순식간에 웃음판이 됐다.

지난 16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안 감독이 이끄는 소리꾼들이 21일 이곳에서 올리는 작은 창극 '토끼타령' 연습에 한창이었다. 서너 시간 걸리는 판소리 '수궁가'를 1시간30분 분량으로 줄인 '토끼타령'은 안 감독이 작창(作唱)을 맡고, 극단 미추 출신 지기학이 연출을 맡았다. 이번 '토끼타령' 특징은 연주자들이 전자 음향기기에 의존하지 않고 목소리로만 천장과 바닥을 울린다는 점이다. 안 감독은 "가사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분명하게 발음해야 한다"고 단원들을 다그쳤다.

풍류사랑방은 커다란 한옥 대청마루에 앉은 것처럼 널찍하고 시원했다. 신발을 벗고 고급스러운 전통 방석에 앉아 소리를 듣고 있으니 옛 선비들의 풍류(風流)가 이랬겠구나 싶었다. 천장에는 한옥의 서까래, 벽은 황토벽과 회벽을 썼고, 바닥은 전통 마루였다. 비좁은 여느 공연장과 달리 여유를 느끼게 하는 넓이였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아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착신음에 방해받을 일도 없다.

'토끼타령'은 안숙선 감독이 공연 전체를 이끄는 '명창' 역을 맡고 민속악단 단원 유미리·이주은·조정희와 국립민속국악원 김현주·김대일·정민영 등 국악원의 대표적 소리꾼 7명이 출연한다. 한 소리꾼이 토끼와 홍어, 조개 등 여러 배역을 맡는 분창(分唱)을 통해 100년 전 초기 창극의 모습을 되살렸다. 김현주와 조정희는 주인공 토끼 역의 앞뒤 부분을 나눠 맡았다. 김현주는 초반부 익살스럽고 경쾌한 토끼였고, 조정희는 후반부 곤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순발력과 재치를 발휘하는 후반부 토끼였다. 별주부 역 김대일(33)은 어머니뻘 안 감독의 아들이 됐다가 남편 역까지 하면서 능청스럽게 장단을 맞춘다.

안 감독은 '수궁가' 토끼 연기로 이름난 명창. 점심 먹으러 이동하는 차 속에서도 후배 김현주에게 '원 포인트 레슨'을 해주느라 바빴다. "토끼는 처음부터 나대면 나중에 할 게 없어. 계산을 잘해서 점점 돋보이도록 해야지."

안 감독은 "풍류사랑방에 어울리는 고품격 국악 공연을 계속 레퍼토리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티켓값은 전석 3만원. 회당 130명 한정,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번'밖에 기회가 없다. 21~23일 국립국악원, (02)580-3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