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족, 손가락질이 예술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4.03.06 00:15

손가락 춤 공연 '키스 앤 크라이'
'제8요일' 반 도마엘 감독이 연출… 아내는 안무, 딸은 영상 촬영
"아이들과의 놀이에서 영감 얻어"

기차역 벤치에 한 여인이 앉아 있다. 이제 나이 들고 지친 그녀는 오래전 기차에서 만났던 첫사랑의 희미한 기억을 되살린다. 너무나 짧았던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손가락 끝 감각만은 여전히 옛사랑을 기억한다. 무대에 등장한 두 무용수의 손가락 춤이 지나간 다섯 남자와의 사랑을 잇달아 불러낸다. 카메라는 즉석에서 이 춤을 촬영해 영상을 스크린에 투사하고, 미리 녹음한 내레이션과 음악이 영상 위로 흐른다. 관객은 '무용'이 실시간으로 '영화'가 되는 과정을 목격한다.

2011년 벨기에에서 초연된 이 작은 공연 '키스 앤 크라이(Kiss & Cry)'에 유럽이 열광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숨이 멎을 듯한 황홀감", 르 몽드는 "가장 독창적인 무대 예술"이라고 했다. 이 공연은 가족이 함께 만들었다. 연출은 벨기에의 영화감독 자코 반 도마엘(57), 안무는 그의 아내 미셸 안느 드 메이(55)가 맡았다. 딸 줄리엣 반 도마엘(24)은 촬영에 참여했다. '키스 앤 크라이' 서울 공연을 위해 방한한 이들을 지난 4일 LG아트센터에서 만났다.

연극·무용·영화가 결합된‘키스 앤 크라이’의 한국 공연을 위해 방한한 반 도마엘 가족. 왼쪽부터 아내 미셸 안느 드 메이(안무), 딸 줄리엣 반 도마엘(촬영), 영화감독인 남편 자코 반 도마엘(연출).
연극·무용·영화가 결합된‘키스 앤 크라이’의 한국 공연을 위해 방한한 반 도마엘 가족. 왼쪽부터 아내 미셸 안느 드 메이(안무), 딸 줄리엣 반 도마엘(촬영), 영화감독인 남편 자코 반 도마엘(연출). /김지호 객원기자
아내 미셸은 "10여년 전 부엌 식탁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줬던 손가락 춤이 이렇게 발전했다"고 말했다. "애들이 좋아하는 걸 보고 모형 기차나 장난감 건물들을 식탁 위에 소품처럼 하나씩 올려놓기 시작했어요."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자기 손가락이나 조명을 '공연'에 추가했고, 마침내 진짜 무대에 오르게 됐다. 줄리엣은 "나중에 공연을 본 남동생이 '어!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저기 있네?'라며 반가워했다"고 말했다.

'키스 앤 크라이'의 손가락 춤은 설렘과 두려움, 열정, 그리움 같은 갖가지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공연을 보면 옷을 하나도 입지 않은 손가락이 얼마나 시적(詩的)이면서 순수한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지 놀랄 거예요."(미셸)

'키스 앤 크라이'는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이 자신의 점수를 기다리는 공간. 반 도마엘 감독은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교차한다는 점에서 사랑에 대한 감정과 닮았다는 생각에 공연 제목으로 했다"며 "한국에서도 익숙한 어휘 아니냐?"고 물었다.

'키스 앤 크라이' 한 장면.
'키스 앤 크라이' 한 장면.
반 도마엘 감독은 '토토의 천국'(1991) '제8요일'(1996) '미스터 노바디'(2009) 등의 영화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그의 영화에선 사람의 '기억'에 대해 유독 큰 관심을 둔다. '토토의 천국'에서 회상 장면 속 주인공이 또 회상하는 이중(二重) 플래시백은 1990년대 영화 마니아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키스 앤 크라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 당장 눈앞의 현실이라 해도 금세 과거가 돼 버립니다. 그런데 그 '과거'는 과연 어디까지가 실제로 일어났던 현실인 걸까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 인간의 기억이고, 저는 그 세계를 작품에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삶에는 이면이 있다. 가족이 함께하는 작업도 마찬가지다. 반 도마엘은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지만, 집에 가서 불 끄고 침대에 누운 뒤에도 작품에 대해 계속 얘기할 때는 난감해진다"고 말했다. 한국 공연의 내레이션은 배우 유지태가 맡았다. 반 도마엘 감독이 추천했다. "예전에 '올드보이'를 여러 번 보면서 뛰어난 배우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스탤지어(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목소리도 이번 공연에 어울립니다."

▷6~9일 LG아트센터, 공연시간 90분, (02)2005-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