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3.25 14:55
올해 대원음악상 대상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게 돌아갔다. 9년 전 손목 부상으로 은퇴 후 재활을 거쳐 다시 무대에 선 정경화. 그녀가 더 위대해 보이는 건 지금도 통증과 싸우며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소치 동계올림픽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올림픽이 열리는 3주 동안, 그녀는 병원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다. 올림픽은 지루한 병원 생활에 더없이 좋은 오락거리였다.
“어쩌면 그렇게 기간이 딱 맞는지!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나랑 김 실장(매니저)이랑 한참을 웃었잖아.”
정경화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진심으로 깔깔 웃었다.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손이 좋지 않은 상태였으니, 다른 연주자 같았으면 아마 절망적인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지난해 조금 무리를 했지” 할 뿐이다. 통증은 어느새 그녀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지난해 아시아 투어 때도 통증이 있을 때마다 주사를 맞고 다녔다.
“지난해 아시아 투어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죠. 바이올린을 1, 2년 하고 말 게 아니라면 꾸준히 관리를 받아야 해요. 그래서 일도 정리하고 일정을 맞췄어요.”
무대 위 암사자의 화려한 재기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무대 위의 암사자’라 불리며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정경화. 그녀에게 위기가 닥친 건 지난 2005년이었다. 손가락 부상을 입게 되면서, 50년간이나 함께해온 바이올린을 내려놓게 됐다. 이후 5년이나 무대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모두가 이것이 그녀의 완전한 은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10년 기나긴 재활 끝, 그녀는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이끄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면서 재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후부터 정경화의 무대는 ‘기적’이 됐다.
두 번째 무대는 대관령 국제음악제 실내악 무대였다. 이 음악제의 공동 음악감독을 맡은 언니 첼리스트 정명화와 함께였다.
“언니와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를 연주하는데, 첼로 솔로 부분을 듣는 순간부터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무대에 다시 돌아오니 정말 황홀했고 감사했어요. 몸은 예전하고 다르니 속으로 염려를 많이 했지만 정말 좋았어요.”
지난해에는 일본, 중국을 포함해 17개 도시를 순회하는 큰 프로젝트인 아시아 투어도 마쳤다.
“어떤 무대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요? 저는 항상 무대에 올라가면 그 무대가 가장 중요했어요. 기적적으로 다시 섰으니 얼마나 더 그러겠어요. 일본 청중은 다른 곳에 비하면 세련됐어요. 한국 청중은 나가면 얼마나 나를 아끼나 느낄 수 있어요. 반응이 오는 걸 보면 흐뭇하고 즐겁죠. 중국은 아직까지도 관객의 수준은 떨어지지만,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기립 박수가 터져나왔죠. 중국이 지난해 제일 흐뭇하고 고마운 경험이 됐어요.”
뉴욕에 살고 있는 정경화는 올해 대원음악상 시상식에 참석차 입국했다. 대원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제8회 대원음악상 대상을 수상한 그녀는 부상과 재기 이후 음악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됐다.
“상을 받을 때마다 항상 큰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잘난 척하면서 ‘그걸 뭐하러 받아’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더없이 감사하죠. 앞으로는 그동안 사랑해주고 지지해준 고국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테크닉보다 값진 것을 얻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진리는 거장에게도 통했다. 세계 최고의 무대만, 그것도 충분히 준비된 상태에만 서오던 완벽주의자였던 정경화. 그랬던 그녀가 달라졌다.
“지난해에는 음악제에 서기로 한 성악가가 갑자기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 거예요. 언니가 ‘정말 큰일 났다!’고 하는데, 제가 나섰죠. 그럼 ‘내가 무대에 설게!’ 음악제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케빈 커너와 충분히 준비가 된 상태이기도 했어요. 지난해에는 그렇게 우연히도 연주를 많이 하게 됐네요.”
정경화는 연주 요청이 와도 쉽게 “예스”라고 답하지 않던 까다로운 연주자로 유명했다. 세계적인 거장인 지휘자 로린 마젤이 직접 전화해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자는 제안에 “곡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가, 8년이나 함께 연주하지 못했다. 당시 마젤은 정경화에게 “Is that all?(그게 다예요?)”이라고 묻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그만큼 무대에 대한 책임감이 지독스러웠어요. 유럽 매니저가 많이 힘들어했죠. 평생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는 고집이 있었어요. 그 상대와 평생 못하게 되더라도 제가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절대 무대에 설 수 없었어요.”
정경화는 <승승장구>에 출연했던 일화를 들려준다. 언니 정명화와 함께 대관령 국제음악제 홍보를 위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그녀는 아이돌 출신 임시완이 MC의 요청에 따라 즉석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녹화 끝나고 ‘어떻게 (바이올린을 연주) 했어?’라고 물어보니, ‘여기에서는 (안 한다고) 거절하면 끝입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음악계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녀는 손가락 부상 이후 예전과 같은 연주는 이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무대에 다시 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제 이 삐걱대는 몸으로 어떻게 그렇게 살겠습니까? 예전보다는 부드러워졌다고 볼 수 있죠. 작년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한 해였어요. 물론 자꾸 완벽주의적인 생각이 올라오기도 하죠. 이런 상황에서 연주를 이끌어가려고 하니까 어떻게 하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예전만큼 연습은 못하지만 머리로 연습해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행복한 고민이죠.”
그 노력 덕분에 정경화는 완벽한 연주 그 이상의 것을 얻게 됐다.

“예전처럼은 못하지만, 대신 지혜가 생겼어요. 지금은 그 안(음악)에 입히고 또 입히고 있어요. 깊음, 슬픔, 어려움, 신비함을 입혀서 나오는 소리가 제게는 순수하게 들려요. 예전처럼 (완벽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건 지금 없어요. 어쩌면 이렇게 자연스러울까 싶죠.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느끼려고 애를 썼지만, 3분의 2는 몸부림을 쳐야 했죠.”
이제 몸 관리는 거의 달인 수준이 됐다. 자신의 상태 이외에도 김연아가 오프닝이 아닌 12일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나 마나 관리 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단다. 몸 관리는 어머니에게 배웠다.
“어머니가 반은 의사였어요. 이모가 의사였죠. 일곱 애들이 몸이 다 다르게 타고났으니 그럴 수밖에요. 우리 남매 중 명훈이가 제일 대단한 체력을 가졌어요. 아버지를 닮았죠. 정신력도 대단해요. 명화 언니는 스스로 몸 컨트롤을 잘해요. 절대 (안 좋은 상태를) 그냥 넘어가게 두지 않아요. 반면 저는 굉장히 예민해서 거기에서 오는 여러 가지를 터득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동생이나 언니보다는 엎어지기도 잘하고, 감정적인 부분이 달라서인지 우리 집에서 제가 제일 약해요. 놀라기도 잘하고.”
나를 있게 한 정트리오,
그리고 어머니
동생 정명훈은 첫 피아노 음반에 정경화를 위한 쇼팽 <녹턴 C# 단조>를 수록하면서, 누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털어놓기도 했다.
“원래 피아노 곡인데 바이올린 버전으로 연주하기도 하죠. 누나가 이 곡을 리사이틀에서 종종 연주했는데, 그때 제가 반주를 했어요. 경화 누나는 내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에요. 평생 많은 음악가들을 만났지만, 그중에서도 경화 누나는 정말 뜨거운 열정을 가진 불덩이 같은 사람이죠. 저한테 음악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습니다.”
정경화는 동생의 이야기에 미소를 지었다고 했다. 이 곡을 함께 연주할 당시 동생 명훈은 18세, 그녀는 22세였다. 두 사람은 유럽 무대에서 쇼팽 <녹턴 C# 단조>를 연주했다.
“유럽에서 이 곡을 앙코르로 연주했어요. 동생이 아름답게 피아노를 쳤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정명훈은 누나에게 음악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 이야기 뒤에는 고된 훈련의 시간이 있었다. “지금은 명훈이가 마에스트로가 되었으니 이런 이야기는 싫어하겠다”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9살에 레번트릿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학교에 보답하는 차원의 공연을 하게 됐어요. 반주자가 필요했는데, 어머니는 ‘명훈이를 반주 시키면 안 되냐?’고 하시더군요. 당시 명훈이는 15살밖에 안 되었는데, 그때는 (연주자로는) 태어나지도 않은 나이였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동생은 인상도 못 쓰고 있다가, 결국 ‘네’라고 대답했죠. 그때부터 아침 7시에 일어나 매일 연습을 했어요. 아주 지독하게 했어요.”
언니 정명화와는 자매 이상의 깊은 우애를 나눴다. 어린 시절부터 낯선 곳에서, 같은 현악기를 한다는 점이 큰 의지가 됐다. 오죽했으면, 언니의 결혼이 그렇게 큰 충격이었을까.
“얼마 전 한의사와 단어를 통해 심리 치료를 시작했는데, 열다섯, 열여섯… 그 시절을 되돌아보다 보니, 마침 언니가 시집갔을 때 뭐가 나온 듯했어요. 언니가 시집갔을 때 충격을 꽤 받았나 봐요. 그걸 예순에 알게 됐어요. 우리는 그럴 정도로 가까운 자매였어요. 의지하면서 연습했으니까요. 그걸 알고 소화시키면 돼요.”
정트리오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어머니 이원숙 여사다. 이 여사는 자녀 교육 책을 출간할 정도로 정트리오 이상의 인기를 얻었다.
“어머니가 감정이 풍부하고 정열적인 분이었어요. 소리를 해도 간드러지게 하셨죠. 제가 바이올린을 하면 ‘신 난다! 신 난다!’고 하셨고, 어쩔 때는 줄줄 우셨어요. 어린 나이에 그런 반응을 보면 얼마나 자신감을 갖게 되겠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관객은 부모님이었어요.”
정경화가 음악에 재능을 보인 건 아주 어려서부터였다. 세 살이 되던 해, 그것도 6ㆍ25전쟁 중 피란 갔던 부산에서 어머니는 정경화를 라디오 방송에 내보냈다.
“태어났을 때부터 제가 노래를 종알종알하고 하도 신기해서, 어머니가 라디오 무대에 저를 내보냈어요. 언니는 앞에서 립싱크를 하고 있었고요. 그게 제 첫 무대였어요. 어머니는 대단한 매니저였죠. 그러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에 올라와서 바이올린을 배우게 됐는데, 저와는 천생연분이었어요. 어려서부터 고음을 좋아했는데, 지금 성격도 그래요.”

아들 얼굴에서 내가 보여
지난해부터 정경화는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아시아 투어나 물리치료 등이 이유였지만, 여전히 그녀의 삶은 뉴욕에 있다. 정경화는 35살, 당시에는 늦은 나이에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그때 35살이면 정말 늦은 나이였어요. 있는 말 없는 말 다 들었죠. 아이를 너무 좋아해서 34살에는 (결혼은 안 해도) 아이를 하나 입양할까 했었는데, 어느 남자 아이냐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포기했어요. 저보다도 그 아이를 위해서요.”
정경화는 자신의 녹음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음반으로 <con amore>를 뽑았다. 수많은 명반 가운데, 소품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소박한 음반이지만 여기에는 아름다운 추억이 묻어 있다.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죠. 작년에 느꼈던 행복과는 다른 차원의 행복이었어요. 날아갈 것 같았죠. 그때 낸 음반이 <con amore>예요. 어느 날은 아들이 그 음반을 듣고 있어서 ‘너에게 있는 사랑을 다 표현했던 연주’라고 이야기해줬어요. 다른 음반은 눈물로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녹음한 거였는데, 그 음반만큼은 아니었어요.”
큰아들은 이제 결혼해 가정을 이뤘고, 둘째 아들은 결혼을 앞둔 여자 친구가 있다.
“아들이 결혼한 지 2년이 됐는데, 아직 손자는 없어요. 빨리 낳으라는 이야기는 절대 안 해요. 며느리가 대학원 학위 끝나기 전에는 애를 가질 거라고 하더군요. 며느리는 생활 능력이 강하고, 사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아이예요. 아들은 와이프에게 잘하는 게 최고죠. 한국 드라마 보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왜 그렇게 못되게 구는지 모르겠어요.”
둘째 아들은 피아노를 전공했다가 그만두고 현재 구글에 다니고 있다. 아들이 음악을 그만둬서 서운하지 않냐는 물음에 “하나도 서운하지 않다”며 손을 내젓는다.
“유진이가 음악에 재주는 있었는데 그만둔 건 아쉽지 않아요. 세상에 음악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만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저는 타고났으니 안 하면 안 되는 거지만, 그게 아니라면 안 하는 게 좋아요. 어머니는 ‘내 뱃속에서 난 딸이, 그 뱃속에서 난 아들과 음악을 하면 얼마나 좋겠냐’ 했지만, 난 아들이 연주하는 건 떨려서 못 보겠더라고요.”
정경화는 유진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애들은 엄마의 거울이에요. 내가 어떻게 하는지 애들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죠. 제가 요즘 마음을 놓고 편해지니까 유진이가 얼마나 예뻐졌는지 몰라요. ‘그동안 미안했다. 이제는 엄마가 모든 걸 놓고 하고 싶은 거 하니까 이렇게 너를 대할 수 있는 거다’라고 했죠. 지금은 너무 행복해요. 누구든 그 과정을 지나야 하죠.”
더 평온해지고 넓은 마음으로 대하는 음악은 분명 다를 것이다. 정경화는 지금 음악의 성서라고 불리는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소나타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레코딩과 공연 투어 등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하다.
“제 소리는 점점 넓어지기 시작해서 지난해에는 제 바이올린에서 비올라 소리가 난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소리가 부드러워지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배하지 않는 소리를 내고 싶어요. 언제 들어도 딱 살아 있는 소리를.”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두경아 기자 | 사진 정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