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연극인 잔치입니까, 미인 잔치입니까

  • 신정선 기자

입력 : 2013.12.25 23:32

미인 패션쇼로 주객전도된 '연극인의 밤'

"연말 연극인들 최대 잔치가 개판이 됐다."(연극제작자 A씨) "보고 있자니 낯뜨겁고 민망했다."(연극배우 B씨).

지난 23일 오후 6시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로비에는 전에 없던 풍경이 연출됐다. 해마다 그해 최고의 연극과 배우를 시상하는 '제51회 대한민국 연극인의 밤&제6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시상식'(주최 한국연극협회)이 있던 날이었다. 시작을 앞두고 한복을 입은 20대 여성 10여명이 등장해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최근 한 모델 에이전시에서 선발한 '한류 홍보 미인'들.

전에 없던 일은 시상식 도중 일어났다. 시상식의 주인공인 수상자들은 상패를 받아들기 무섭게 수상 소감도 말하지 못하고 쫓기듯 내려와야 했다. 의아해하던 참석자들 앞에 패션쇼가 펼쳐졌다.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입은 '한류 홍보 미인'들은 저고리를 벗어던지고 속살을 드러내며 무대를 돌았다. 참석자들 사이에서 실소가 잇따랐다. "저럴 시간에 수상 소감이나 말하게 하지." 연극연출가 C씨가 한숨을 쉬며 한 말이다.

행사 기획자는 "참석한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연극인들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펼친 사상 최초의 특별 의전"이라며 "한복을 벗으면 드레스로 변신하는 패션 아트 퍼포먼스가 빛난 무대 위 콜라보레이션"고 했다.

'미인'과 '패션'이 강조된 행사에 대해 임대일 집행위원장은 "연극인만의 잔치로 끝나지 않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 홍보 미인이 필요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축하 공연 중 일부는 학예회장에 왔나 싶을 정도로 수준 이하였다. 윤봉구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은 "행사 진행을 집행부에 일임해서 구체적인 사안은 모르겠지만, 일부 순서는 제가 봐도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미숙했다"고 했다.

한 수상자는 "소박하면서도 권위 있는 연극인의 밤은 어디 갔나"고 탄식했다. 미인이 한복을 벗어야 '남들도 알아주는 잔치'가 되는 것일까. 연극협회는 '배고픈' 예술인 줄 알면서도, 그저 연극이 좋아서 대학로를 지키는 연극인들이 근간이 된 단체다. 화려한 외양과 남의 시선이 연극인보다 더 중시된다면 협회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