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의 새로운 도전

입력 : 2013.12.23 15:16

영화 <마더> 이후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연기하는 여배우’란 타이틀을 거머쥔, 존재감 대단한 여배우 김혜자. 그녀가 연극 무대에 오른다. 일흔이 넘은 나이, 6년 만의 연극 무대 복귀라는 사실만으로도 화제인데 혼자서 무려 11역을 연기하는 모노드라마라고 한다.

'국민엄마' 여배우 김혜자.


국민엄마 김혜자가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오른다. 2006년 <다우트>의 수녀 역 이후 6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르는 그녀가 선택한 작품은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이하 <오스카!>) 백혈병에 걸린 열 살 소년 오스카와 소아 병동의 외래 간호사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은 장미 할머니의 우정을 그린 모노드라마로, 김혜자가 1인 11역을 맡았다.


영화 <마더>의 봉준호 감독이 그랬듯이,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은 함영준 감독 역시 “작품의 저작권을 획득한 순간부터 주인공으로는 김혜자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평소 TV에서 자주 보여준 어머니의 이미지보다는 좀 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혼자서 11역을 연기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힘든 도전입니다. 관객에게 단순히 즐거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오스카의 마지막 일상을 통해 삶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그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의미를 전하고 싶어요.”


작품의 내용에 반한 그녀는 <오스카!>의 가장 큰 매력은 우리의 인생과 비슷한 면이 많다는 점이라고 했다. 원작 소설은 한 아이의 마지막 12일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루를 10년처럼 보내보자는 아이와 할머니의 귀여운 협정으로 아이는 10대부터 1백 살에 이르는 한 평범한 남자의 인생을 통해 삶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돼요. 오스카와 장미 할머니, 하나님의 대화를 통해 우리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제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 중에서 오스카는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해 신에게 물어보기 시작한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보편적인 의문을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이 작품 안에 담겨 있다. 결국 오스카가 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따뜻함을 전해주는 사랑의 편지다.



6년 만의 연극 무대 복귀작


데뷔 이후 드라마는 꾸준히 출연했지만, 영화나 무대에서는 자주 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는 3편, 연극은 10여 편에 불과하다. 드라마에서는 주로 누군가의 엄마나 며느리 역할이었지만, 스크린이나 무대에서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TV에서의 모습 그대로를 무대에서 만나면 지루하잖아요.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에게 다가가는 게 참으로 설레요. 이번 작품에서 11명의 연기를 한다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에요. 많은 분들이 제 도전을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연기에 대한 내공이야 설명이 필요 없는 부분이지만, 일흔이라는 나이의 여배우에게 1시간 30분을 혼자 채워야 하는 연극 무대는 결코 만만한 도전이 아니다.


“솔직히 부담스러웠어요. 작품이 좋아서 출연한다고는 했지만 대본을 받아 들고 ‘이렇게 두꺼운 책을 어떻게 외우나?’ 하고 절망에 빠졌지요. 체력적인 부담도 상당했고요. 하지만 연습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는 힘이 생겨요. 처음엔 30분 연습도 힘들다고 느꼈는데, 이젠 하루에 5~6시간 연습도 거뜬해요. 이게 작품의 힘인 것 같아요.”


본격적인 공연이 올라가기 전, 연습실에서 만난 김혜자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작품에 열정을 보이고 있었다. 작품에 들어가면 극도로 예민해지고 캐릭터에 몰입하는 그녀인지라 이번에도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까무러칠 것 같지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열심히 하거든요.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모노드라마는 홀로 모든 걸 해내야 하는 1인극이잖아요.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낼 생각입니다.”


많은 역할을 소화해야 하는 만큼 연기자로서 해야 할 숙제도 많다. 레슬링을 하는 장면을 위해서 몸을 움직이고, 샹송을 부르기 위해서 프랑스어도 배웠다.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에 최장수 드라마에 최선을 다했다.

'국민엄마' 여배우 김혜자.


실제로는 ‘불량엄마’인 국민엄마


작품에서 만나는 김혜자는 완벽하지만, 실제 모습은 조금 다르다. 그만큼 자신이 아닌 100% 캐릭터로 대중을 만나왔기 때문에, 그 갭이 큰 게 사실이다.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녀 스스로 “실제 모습과 다른 부분이 굉장히 많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국민엄마라는 타이틀이다. 부담스럽고 꺼리는 말이기도 하다. <전원일기>와 CF에서 만들어진 너그러운 엄마의 이미지는 실제 김혜자와는 조금 다르다. 집안일보다는 연기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기에 늘 남편과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살림을 살뜰하게 해내는 주부도 아니고,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주는 열혈맘도 아니었다.


“엄마 노릇을 거의 못 했어요.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남편의 역할이 컸어요. 아이들 학교 일도 신경 쓰지 못했고요. 작품에 몰입하면 예민해지는 스타일이라서 가족이 많이 고생했어요. 그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배우 김혜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올 수 있었을까 싶어요.”


국민엄마가 사실은 엄청난 애연가였다는 사실도 색다른 부분이다. 3년 전에 담배를 끊긴 했지만 그녀는 평생을 엄청난 골초로 살았다. 어딜 가든지 담배가 쌓여 있어야 안심이 되는, 심각한 애연가였다.


“담배는 3년 전에 끊었어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맛이 없어졌어요.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태우는데, 갑자기 맛이 없더라고요. 그 길로 바로 끊었어요.”


그녀의 금연은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여기에서 그녀가 배우로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가족의 마음이 느껴지는 에피소드가 있다.


“딸이 기도를 해서 끊을 수 있었어요. 담배 맛이 이상하다고 느껴지던 그날, 미국에 있는 딸이랑 통화를 했어요. 제가 ‘담배 맛이 이상하다, 끊어야겠다’고 말했더니 딸이 울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매일 새벽 기도를 했다고요.”


스스로를 불량엄마라고 지칭하는 그녀이지만, 배려와 사랑으로 뭉친 가족 덕분에 배우의 자리를 잘 지켜올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음으로 응원해주는 가족이 있었기에 김혜자라는 이름도 이어질 수 있었다고. 일흔이라는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건 가족이 엄마나 아내, 할머니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고 배려해주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20년 동안 이어온 아름다운 봉사


만약 오스카와 같이 신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으냐는 한 언론의 질문에 그녀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이야기를 들려줬다. 


“처음 아프리카에 갔을 때, 항생제가 없어서 몸이 썩어 죽어야 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벌어지나요? 신에게 묻고 싶고 따지고 싶고 그랬어요. 그리고 너무 험한 뉴스가 나오면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궁금할 때가 많아요.”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녀는 신이 본인에게 연기라는 재능을 준 것이 아이들을 위해서 쓰라는 의미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엾고 힘없는 아이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본인의 소명이라고. 봉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일 필요도 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방문했던 아프리카가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렇게 시작한 그녀의 봉사 활동은 20여 년 동안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큰 물질이 있어야 아이들을 돕는 건 아니에요. 관심과 마음이 중요해요. ‘아프리카를 돕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만 있어도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어요. ‘우리나라도 못사는데 아프리카까지 도와야 하느냐’는 식의 힐난도 없어졌으면 하고요. 많은 분들이 봉사에 관심을 갖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서 좋은 것 같아요.”


일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봉사에 전념하고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족의 사랑과 배려 덕분이라고 한다.

'국민엄마' 여배우 김혜자의 연극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공연 모습.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오스카!>에서는 나이 든 자신을 상상 속에서 만나는 장면이 있다. 이때 “늙는다는 건 추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김혜자는 그 대사가 솔직해서 마음에 든단다. 올해 72세, 왕성한 활동은 하고 있지만 만만치 않은 숫자의 나이를 가진 배우에게 그 대사의 울림은 더욱 깊을 것이다. 그녀는 한 인터뷰 자리에서 나이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10대와 20대는 삶이 저절로 즐겨지지만, 나이가 들면 즐기기 위해 머리를 써야 해요. 삶은 거저 주는 선물이 아니라 빌린 거거든요. 잘 써서 돌려줘야죠.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요. 나이가 드니까 ‘그래, 여기까지구나. 그 너머는 신의 영역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와요.”


인생을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깊어진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매년 영정 사진을 바꿔놓으면서 마지막을 준비한다.


“어느 상갓집에 갔는데, 너무 보기 싫은 영정 사진을 걸어놨더라고요. 주민등록증 사진인데, 저건 좀 너무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진을 준비해놓고 가야 나중에 자식들이 당황해하지 않겠다 싶어서 미리 준비를 해둬요.”


“죽는 것을 왜 무서워하나.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는 이 작품 속 명대사 가운데 하나다. 김혜자는 평소에 대화를 하다가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라고 툭 말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꺼내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일흔의 삶을 살아낸 배우다.


연말, 곧 한 살 늘어나는 나이를 두고 고민이 깊어진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봐도 좋겠다. “고통은 지면 안 돼요. 누구나 겪는 거고 힘들지 않은 일은 세상에 없어요. 당연히 힘들어요.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는 각자의 몫이에요. 답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김혜자의 이 같은 담백한 인생 조언은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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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 임언영 기자 | 사진 조선일보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