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니다, 이 연극 안될 거란 거"

  • 신정선 기자

입력 : 2013.11.05 03:04 | 수정 : 2013.11.05 10:09

[유인촌, 8년 만에 연극 무대 '홀스또메르' 주연·연출]

톨스토이 원작 각색한 음악극… 영욕 세월 보낸 늙은 말 연기
"내 손으로 야외극장 짓고싶어 얼마 전 굴착기 면허도 땄죠"

무대 중앙에는 나무 말뚝이 하나. 검은 '말' 한 마리가 오른쪽 앞발을 말뚝에 올린다. 왼쪽 앞발은 축 늘어졌다. 떨궜던 고개를 잠시 들더니 입을 연다. "아, 가려워. 가려워 죽겠네." 한 손으로 엉덩이를 긁다 양볼을 부풀려 킁킁 거친 숨소리를 토해낸다. "오, 인생이여, 삶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데…." 잠시 후 흰 옷을 입은 신사가 말을 보더니 인상을 쓰며 외친다. "도살해버려!"

목숨이 경각에 처한 늙은 말은 검은 연습복을 입은 '배우' 유인촌이다. 1997년 그가 주연해 국내 초연한 연극 '홀스또메르'로 무대에 정식 복귀한다. 4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 유씨어터 지하 연습실에는 그의 복귀작을 미리 보려는 공연 관계자 30여명이 자리를 메웠다. 구자흥 명동예술극장장,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이창기 강동아트센터 관장 등이 모였다.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해 성악가와 무용수가 함께 출연하는 낭독극 '파우스트'에 잠시 출연하기는 했으나, 배우로서 정식 복귀는 이번 '홀스또메르'가 시작이다. 연출도 직접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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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유씨어터 지하 연습실에서 배우로 정식 복귀하는 유인촌이 늙은 말 홀스또메르로 열연하고 있다. /김지호 객원기자
도살 이틀 전, 영욕의 삶을 반추하는 늙은 말이 주인공인 '홀스또메르'는 톨스토이 단편을 각색한 음악극이다. 피아노, 바이올린 등 5인조 밴드가 라이브로 연주한다. 홀스또메르는 얼룩말이라고 천대받다가 어느 공작의 눈에 들어 경주마로 성공하지만 결국 버림받는다. 60대 유 전 장관은 망아지의 천진함, 좋아하는 암말을 바라보는 수줍음, 자신을 알아준 공작을 바라보는 의기양양함을 한달음에 오갔다. "내가 이토록 초라한 불구자가 된 것이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한 줄의 외침만으로도 "나이 육십이 넘으면 홀스또메르 연기도 깊어질 것 같다"던 8년 전 공연 때 다짐이 예언처럼 실현됐음을 보여줬다. 무대를 떠나 있던 긴 시간의 갈증이 충전기가 되기라도 한 듯, 1시간 40분간 뛰고 걷고 눕고 굴렀다.

시연회 직전 유 전 장관은 "이 작품은 여러 번 공연했지만 한 번도 흥행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며 "그래도 이 작품을 붙들고 있는 이유는 한 통의 편지 때문"이라고 했다. IMF 위기 여파로 도산한 한 사업가가 공연을 보고 삶의 의지를 찾아 감사하다고 써보낸 편지였다. "관객 한 명에게라도 더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전국 어느 곳에서든 공연하겠다"는 것이 그의 의지다. 복귀 무대는 오는 13~14일 전남 해남문화예술회관에서 시동을 건다. 서울은 내년 4월 명동예술극장 공연을 추진 중이다.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극장도 짓는다. 수년 전 마련해둔 강원도 봉평 폐교의 야외극장 터에 실내 극장을 지을 예정이다. 최근 굴착기와 지게차 조종 면허증까지 땄다. "첫 삽부터 제 땀이 들어간 곳에서 관객과 호흡하는 것, 남은 인생은 그렇게 배우로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