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랭한 韓中日… 뜨거운 연극판

  • 도쿄=신정선 기자

입력 : 2013.10.27 23:33

베세토연극제 창설 20주년, 한국 참가작 '페르귄트' 공연 현장

1993년 8월 연출가 김의경씨는 수개월째 숙고하던 계획을 일본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에게 제안했다. "중국까지 불러서 3개국 연극제를 만들어봅시다." 한국, 중국, 일본 수도의 영문 철자를 따 '베세토(BeSeTo)연극제'라는 이름도 지었다. 그런데 중국이 미적거렸다. 참다못한 김씨가 중국 쉬샤오중(徐曉鏡) 중앙희극학원(中央戱劇學院) 원장을 향해 말했다. "한·중·일의 과거를 청산하는 데 우리 연극인이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정적인 설득에 쉬 원장은 마침내 김씨의 손을 잡았다. "김 선생, 우리는 동지요."

그로부터 20년, 아시아 유일의 '빅3' 연극제인 베세토연극제는 끊임없는 영토 분쟁과 잇따라 터지는 정치인의 '망언' 외풍(外風)에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첫해 서울에서 시작해 3개국이 번갈아 개최한다. 매해 각국 대표작 5~6편이 나온다. 올해 개최지는 일본. 창설 20주년을 맞아 도쿄, 돗토리, 도가 등에서 11월 10일까지 두 달간 이어진다.

지난 26일 도쿄 신국립극장의 플레이하우스(1010석)에서는 극단 여행자의 '페르귄트'(연출 양정웅)가 일본 관객에게 선보였다. 2009년 LG아트센터에서 초연해 그해 대한민국 연극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날 공연의 '불청객'은 태풍이었다. 태풍 예보에 예매 취소가 잇따랐다. 그럼에도 좌석 60%가 찼다. 일본어 자막과 함께 이어진 3시간 공연 뒤에는 우렁찬 박수가 나왔다. 관객 오가와 도카히로(小川貴大)는 "낯선데도 공감했다. 이런 것이 국적을 뛰어넘는 동질감인 것 같다"고 말했다.

26일 도쿄 신국립극장에서 올라간 연극‘페르귄트’. 2막 끝부분, 늙고 지친 페르귄트(정해균)가 구원의 여인인 솔베이지(강정임)를 만나 삶의 수수께끼를 풀어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26일 도쿄 신국립극장에서 올라간 연극‘페르귄트’. 헨리크 입센의 원작을 재창조한 작품으로, 일본 관객의 큰 박수를 받았다. 2막 끝부분, 늙고 지친 페르귄트(정해균)가 구원의 여인인 솔베이지(강정임)를 만나 삶의 수수께끼를 풀어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신국립극장 제공
'페르귄트'를 비롯해 한국의 대표작이라 할 오태석 연출의 '백마강 달밤에'(1994),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2001), 고선웅 연출의 '칼로 막베스'(2011) 등이 베세토를 통해 해외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중국에서 공연한 '칼로 막베스'는 "이렇게 에너지 넘치는 연극은 처음 본다"는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정치가 풀지 못한 논란을 돌파하는 쾌도난마(快刀亂麻)의 장(場)이 되기도 했다. 1995년 도쿄에서 일제 침략에 대한 암묵적 저항을 담은 '덕혜옹주'(연출 한태숙)가 오르자, 이시카와 슈지 전 베세토위원회 일본 위원장은 "상호 이해를 위한 증오의 불가피성을 엄숙히 인정한다"는 양식 있는 반응을 보여 화제가 됐다.

20주년을 맞았으나 여전한 숙제도 있다. 국제 연극제치고는 참여작이 적고, 개최 기간도 평균 1주 안팎으로 짧아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정부 기관의 지원에 주로 기대니 규모 확대에 한계가 있다. 한국 배우들은 창설 이래 '노 개런티'가 관행이다. 베세토 한국위원회 전 위원장인 구자흥 명동예술극장 극장장은 "연극인들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이 없었더라면 지속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간 다카유키 일본 베세토위원회 위원은 26일 "앞으로는 연극을 서로 보여주는 단순한 교류의 차원을 넘어, 공동 제작 작품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는 예술 프로젝트로 키워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